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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건’된 왕건왕릉
테마 관광 작성자 김인호 등록일 2014-02-12
첨부파일 123.png
요약정보 현릉은 1993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현릉으로 불리는 왕건왕릉의 모습은 1994년 북한의 대대적인 개건(改建)으로 인해 현재와 같이 변형되었다. 현릉은 2012년 6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의 12개 유적군에 포함되어 있다.

북한의 개건 작업은 대부분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역사적 정통성을 알리기 위한 작업으로 기존 유적이나 문화재의 형식을 어느 정도 유지한 상태로 '개건'이라는 의미처럼 '고쳐서 세우는'의미로 쓰인다. 현릉으로 불리는 왕건왕릉의 모습은 1994년 북한의 대대적인 개건(改建)으로 인해 현재와 같이 변형되었다.  

개건 이후 왕건왕릉의 전경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왕건은 877년 송악군의 사찬인 왕륭의 아들로 태어나 한반도 중부지역을 석권한 궁예의 부하가 되어 서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경상남도까지 공략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나 궁예의 폭정과 위협에 반기를 들어 휘하 장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이후 다음해인 919년에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가 있는 지금의 개성일대인 송악으로 옮겼으며 궁성을 송악산 아래에 자리하도록 하였는데 그곳이 현재 만월대로 불리는 '고려궁성'이다. 

이후 왕건은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935년에는 신라를 흡수하였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삼한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936년 거란에게 멸망당하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10만에 달하는 발해의 유민을 포용하여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로 불렸던 미완의 민족통합을 최종적으로 이뤄냈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고려에게는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할 만한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관계로 한반도 전체가 고려의 영역으로 통일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기로 했다.

삼한통일과 민족통합을 이루어낸 왕건은 943년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세워진 즈음 세상을 떠났는데, 현재 왕건과 부인 신혜왕후가 합장된 현릉(顯陵)은 개성 남대문에서 약 3.5km 가량 떨어져 있는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해 있다.  원래 현릉은 송악산 서쪽 파지동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릉이 잦은 전란으로 인해 3번 가량 이장되었기 때문인데, <고려사>에 쓰여진 바로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태조의 능을 함께 강화로 옮겼으며 몽골과의 강화 이후 개성에 다시금 안장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태조 왕건이 안장된 최초의 현릉 모습은 현재 살펴 볼 수가 없는 상태이다.

 

왕건왕릉 석실 내부 모습, 매죽도(위쪽)와 노송도(아래쪽)


현릉은 1993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석실구조로 이루어진 현릉의 매장주체부는 전면에 석실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끝에는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은 화강암의 판석을 이용해 사방에 벽을 만들었는데 석실의 상부는 단을 두어 좁힌 뒤 천장돌을 올린 방식으로 지어졌다. 석실 바닥의 중앙에는 관대가 자리하는데 관대의 좌우로 벽과 맞닿게 설치한 부장을 위한 단이 설치되어 있고, 실의 네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러져 있는데, 당시에는 동서벽의 벽화만이 확인될 정도였다. 동벽에는 매죽도(梅竹圖)와 청룡의 꼬리 부분이 남아 있으며, 서벽에는 노송도(老松圖)가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으며 매화와 백호의 모습도 보인다. 


북벽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무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천장에는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릉 벽화의 그림을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라고 하는데, 현릉과 같이 연대가 명확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현릉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992년, 능역의 확장을 위한 공사 중 청동제 왕건좌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지난 2006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녁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현릉은 작년 6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의 12개 유적군에 포함되어 있다. 

출처: 월간 <통일한국> 2013년 12월호, 평화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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