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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도 단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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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도>단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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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함경남도 단천시 개요
함경남도 북동부에 위치해 있는 시. 서쪽은 이원군ㆍ덕성군ㆍ허천군, 북쪽은 양강도 갑산군ㆍ운흥군ㆍ백암군, 동쪽은 함경북도 길주군ㆍ김책시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동해에 면해 있다. 동서(봉화리~삼거리) 간의 길이는 56km이고, 남북(용흥리~대흥동) 간의 길이는 91km이며, 면적은 2,170여 ㎢로서 도 면적의 약 12%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39동 39리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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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단천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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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함경남도 단천시 지명유래
고려시기 사용해왔던 단주의 ‘단’자와 ‘주’자가 달린 고을이름을 ‘천’이나 ‘산’자로 바꾸는 규례에 따르고, 또한 크고 작은 강하천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이 고장의 자연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내 ‘천’자를 붙여 단천이라 하였다.
 
북한지역정보넷 함경남도 단천시 역사
단천시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이 발굴되어 적어도 이 시기부터 인류가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기원 1세기 경에 남옥저에 속해 있었고 후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발해국이 건국되면서 단천시 지역은 발해의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소속되어 있었다. 발해가 패망하면서 한때 여진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고려가 건립되면서 고려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여진족의 세력이 다시 이곳에 미쳤고 고려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107년(예종 2년)에 윤관(尹瓘)이 십여만 대군을 이끌고 함흥(咸興) 일대를 수복하고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복주(福州), 공험진(公險鎭), 통태진(通泰鎭), 숭녕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등 9성을 축조하였다. 이 9성 중의 복주가 현재의 단천시 지역에 해당된다. 그 후 다시 여진의 지배하에 들었는데, 오래전부터 여진은 단천시 지역을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 칭하였다.

13세기 중엽에는 원나라의 손아귀에 들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관하에 있었으며 이때 단천시 지역을 독로올(禿魯兀)이라 하였다. 1356년(공민왕 5년)에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실시하여 다시 고려의 판도로 수복되었고 1375년(우왕 1년)에 단주(端州)로 되었다. 조선이 건립되어 1397년(태조 6년)에 지단주군사(知端州郡事)로 개편되었고 1413년(태종 13년)에 단천으로 고치고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1702년(숙종 28년)에 함경도 단천군으로 개편되면서 산하에 파도사(波道社), 복귀사(福貴社), 하다사(何多社), 마암사, 수하사(水下社), 수상사(水上社), 이만사, 고만사(高滿社), 이상사(利上社), 두일사(斗日社) 등 10사를 두고 관할하였다.

1720년(숙종 46년)에 군으로부터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872년에 마암사를 신만사(新滿社)로 개칭하고, 수상사를 갑산부(甲山府)에 이관하였으며, 이만사 일부 지역을 성진군(城津郡, 현재 김책시)에 편입하고, 일부 지역은 이리하사(利下社)로 개편하여 9개 사를 관할하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부군제를 실시하면서 함흥부(咸興府) 단천군으로 되었다. 1896년(건양 1년)에 전국을 13도로 획분하면서 함경남도 단천군으로 개편되었고, 1898년(광무 2년)에 동부의 일부 지역이 성진군에 편입되었다.

조선 말에 군에 소속된 사 전체가 면으로 개편되어 파도면(波道面), 복귀면(福貴面), 하다면(何多面), 신만면(新滿面), 수하면(水下面), 광천면(廣泉面), 이상면(利上面), 이하면(利下面), 두일면(斗日面)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이상면과 이하면을 병합하여 이중면(利中面)을, 두일면을 분리하여 남두일면(南斗日面)과 북두일면(北斗日面)을 각각 신설하였고, 1939년에 파도면을 단천면(端川面)으로 개칭하였으며, 1943년에 단천면을 단천읍(端川邑)으로 승격시켰다가, 광복 직후 다시 단천면으로 강등하여 산하에 9면을 두고 관할하였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전 단천군 수하면의 전체 리가 신설되는 허천군(虛川郡)에, 전 단천군의 이중면·광천면·남두일면의 전체 리와 북두일면의 8개 리가 신설되는 광천군(廣泉郡)에, 전 단천군 북두일면의 4개 리가 양강도 백암군(白岩郡)에 각각 편입되었다. 동시에 전 단천군의 단천면·복귀면·하다면·신만면의 전체 리를 통합하여 단천군을 구성하여 단천면의 금봉리·혈사리·덕흥리·내문리·창현리·용성리·복천리·사동리·주남리·성재리를 병합하여 단천읍(端川邑)을, 단천면의 송평리·오몽리·두언태리를 병합하여 두언리(斗彦里)를, 단천면의 증봉리·봉양리·상직절리를 병합하여 직절리(直節里)를, 단천면의 신창리·은호리·기평리를 병합하여 신호리(新湖里)를, 신만면의 개평리와 평서리를 병합하여 삼거리(三巨里)를 각각 신설하고, 단천면의 문호리·동호리·외문리를 병합하여 문호리(文湖里)로, 하다면의 연대리를 단천군 연대리(蓮坮里)로, 하다면의 양평리·고읍리·종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양평리(陽坪里)로, 하다면의 달전리·혜목리를 병합하여 달전리(達田里)로, 하다면의 송파리·풍화리와 종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파리(松坡里)로, 단천면의 영산리·고령리·독평리를 병합하여 영산리(灵山里)로, 하다면의 백상리·백자동리를 병합하여 백상리(柏上里)로, 하다면의 가원리·개장리를 병합하여 가원리(加元里)로, 하다면의 쌍룡리·좌역리·쌍상리를 병합하여 쌍룡리(雙龍里)로, 신만면의 신동리·신곡리를 병합하여 신동리(新洞里)로, 신만면의 정동리·용천리를 병합하여 정동리(貞洞里)로, 신만면의 석우리·안시동리를 병합하여 석우리(石隅里)로, 복귀면의 복평리 일부와 복상리를 병합하여 복평리(福坪里)로, 복귀면의 장내리·송오리와 복평리 일부, 단천면의 용암리를 병합하여 장내리(場內里)로, 복귀면의 용연리·용포리·송남리를 병합하여 용연리(龍淵里)로, 복귀면의 원평리와 원산리를 병합하여 원산리(元山里)로, 복귀면의 용흥리·용강리·노동리를 병합하여 용흥리(龍興里)로, 복귀면의 기암리·정석리·대로동리를 병합하여 기암리(奇巖里)로 각각 개편하여 1읍 22리를 개편 관할하였다. 1953년에 영산리 일부 지역이 단천읍에 편입되었고, 1954년에 두언리 일부를 분리하여 오몽리(吾夢里)를 신설하였으며, 송파리 일부 지역을 양평리에 편입하는 동시에 양평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달전리에 흡수시켰다.

1961년에 장내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두언리에 편입하고 두언리를 노동자구로 승격하여 당시 군 산하에 1읍 1구 22리를 두고 관할하였다. 1967년에 장내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두언노동자구에 편입하였고 양평리 일부 지역을 직절리에 편입하는 동시에 직절리를 노동자구로 승격시켰다. 1974년 5월에 광천군이 폐지되면서 광천읍이 노동자구로 강등되었고, 지초리가 금덕노동자구에, 대신리가 대흥노동자구에 각각 편입되어 전 광천군의 7구 19리 전체가 단천군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문호리 일부 지역을 단천읍에 편입시켰고 기암리·원산리·용흥리를 이원군에 이관하였다가 1981년 2월에 이원군의 원산리·용흥리를 다시 흡수하여 1읍 9구 39리를 관할하였다.

1982년 8월에 단천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단천읍을 분리하여 복천동(福川洞)·덕흥동(德興洞)·금봉동(錦峰洞)·내문동(內門洞)·양산동(梁山洞)을, 금덕노동자구를 분리하여 금골동·문화동(文化洞)·사오동(四五洞)·본산동(本山洞)·전진동(前進洞)·탐사동(探査洞)·백암동(白岩洞)·선광동(選鑛洞)을, 용양노동자구를 분리하여 백금산동(白金山洞)·영웅동(英雄洞)·금산동(金山洞)·돈산동을, 두언노동자구를 분리하여 항구동(港口洞)·두언동(斗彦洞)을 각각 신설하였고, 직절노동자구의 일부를 양산동에 편입하는 동시에 직절노동자구를 직절동(直節洞)으로, 용대노동자구를 용대동(龍坮洞)으로, 광천노동자구를 광천동(廣泉洞)으로, 동암노동자구를 동암동(東岩洞)으로, 포거노동자구를 포거동(堡巨洞)으로, 대흥노동자구를 대흥동(大興洞)으로 각각 개편하여 25동 39리를 관할하였다.

1985년에 두언동을 해안동(海岸洞)으로 개칭하였고, 금골동을 분리하여 금골일동·금골이동·금골삼동을, 본산동의 일부를 분리하여 남풍동(南豊洞)을, 탐사동의 일부를 분리하여 지초동(芝草洞)을 각각 신설하였다. 1986년에 용연리 일부를 분리하여 신단천일동(新端川一洞)과 신단천이동(新端川二洞)을, 1988년에 대흥동의 일부를 분리하여 북두동(北斗洞)·무학동(舞鶴洞)·대신동(大新洞)·양천동(陽川洞)을 선후 신설하였으며, 1995년에 항구동을 분리하여 항구일동(港口一洞)·항구이동(港口二洞)·항구삼동(港口三洞)을 신설하고, 대흥동을 대흥일동(大興一洞)으로 개칭하였고, 양천동을 분리하여 대흥이동(大興二洞)을 신설하였다. 1996년에 해안동을 분리하여 해안일동(海岸一洞), 해안이동(海岸二洞)을 신설하였다.

2002년 현재 행정구역은 39동(광천동, 금골일동, 금골이동, 금골삼동, 금봉동, 금산동, 남풍동, 내문동, 대신동, 대흥일동, 대흥이동, 덕흥동, 돈산동, 동암동, 양산동, 용대동, 무학동, 문화동, 백금산동, 백암동, 복천동, 본산동, 북두동, 사오동, 선광동, 신단천일동, 신단천이동, 양천동, 영웅동, 전진동, 지초동, 직절동, 탐사동, 포거동, 항구일동, 항구이동, 항구삼동, 해안일동, 해안이동), 39리(가원리, 가응리, 달전리, 답동리, 덕주리, 돌산리, 두연리, 연대리, 영산리, 용덕리, 용연리, 용잠리, 용흥리, 이파리, 이풍리, 문암리, 문호리, 백상리, 복평리, 봉화리, 삼거리, 석우리, 송정리, 송파리, 신동리, 신평리, 신풍리, 신호리, 쌍룡리, 양평리, 영평리, 오몽리, 와동리, 운천리, 원산리, 장내리, 정동리, 증산리, 화장리)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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