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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웃옷 가운데서 기본이 되는 저고리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래다. 그러나 웃옷에 관한 옛기록은 고대시대부터 보인다.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는 “마한의 서쪽 바다 섬 위에 주호국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털가죽옷을 입었는데 위만 있고 아래가 없다”고 하였다.

주호국은 당시 진국에 속한 마한 소국의 하나였다. 이 기록에서 ‘털가죽옷의 위’란 웃옷인 긴 저고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시대에 이미 웃옷 즉 저고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아래옷이 없었던 것처럼 서술된 것은 주호국 사람들의 옷차림을 정확히 전하지 못한 것이다. 주호국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바닷물고기나 바다나물 같은 것을 채취하여 생활하였으며 이런 생활상 관습으로 인하여 그들은 늘 바짓가랑이를 높이 걷어올렸거나 아래를 간단히 입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노동생활을 할 때에는 아래 바지가 늘 긴 털가죽 웃옷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고대의 웃옷 형태에 대해서 전하는 직관자료가 없으므로 그 구체적인 모양을 알 수 없으나 고대와 잇닿은 삼국시대의 초기에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저고리의 앞중심이 완전히 터진 곧은깃저고리를 왼쪽으로 여며 입은 것으로 보아 고대의 저고리도 대체로 그러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고대에는 이밖에도 둥근깃저고리도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예전’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대 종족의 하나였던 예족들은 “남자, 여자가 다 둥근깃옷(곡령)을 입는다”고 하였다.

이 둥근깃옷이 앞을 터지게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의 둥근깃옷의 앞이 막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족의 둥근깃옷의 앞도 터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둥근깃옷은 여며 입는 곧은깃저고리와는 다른 형식의 웃옷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고대에 있었던 두 가지 종류의 웃옷인 여며 입는 곧은깃저고리와 여미지 않고 입는 둥근깃저고리는 그후 삼국시대에도 계승되었다. 삼국시대의 저고리를 기록에서는 ‘유(?)’, ‘장유(長?)’, ‘삼(衫)’, ‘복삼(複衫)’, ‘위해(尉解)’ 등으로 표기하였다. 여기서 ‘유’, ‘삼’ 등은 저고리, 적삼 등 웃옷에 대한 한자 표기이고 ‘장유’는 긴 저고리라는 뜻이며 ‘복삼’은 겹으로 지은 저고리를 특징지여 붙인 한자말이었다. 저고리에 대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표기들 가운데서 ‘삼’이 일반적으로 널리 쓰였다.

삼국시대 저고리의 형태는 고구려고분벽화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벽화 자료들에 의하면 고구려에서의 남자 저고리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곧은깃저고리이며 다른 하나는 둥근깃저고리였다. 곧은깃저고리는 깃이 직선으로 아래 도련까지 내려왔으며 앞중심을 완전히 터지게 한 웃옷으로서 그 길이는 허리를 넘어 엉덩이를 가릴 정도였으며 깃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여며 허리띠를 고정시키게 되어 있었다. 둥근깃저고리는 깃이 둥글고 깃 아래는 터진 곳이 없이 막혔으며 길이는 곧은깃저고리와 비슷하였다. 이 저고리도 입은 다음에 허리띠를 매게 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저고리 가운데서 곧은깃저고리가 삼국시대의 기본 웃옷이었다. 그것은 곧은깃저고리는 압록강과 대동강 유역을 비롯하여 각지에 있는 고구려고분벽화들에서 보이지만 둥근깃저고리는 감신무덤 벽화와 그밖의 몇 개 고분벽화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유형의 저고리 가운데서 당시 곧은깃저고리가 기본 웃옷으로 된 것은 그것이 둥근깃저고리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자연기후에 더 적합하고 입고 벗거나 그밖에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편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곧은깃저고리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그 하나는 품과 소매 길이가 몸에 맞게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런 저고리는 생산활동과 일상생활에 편리하였으므로 일반 백성들이 많이 입었다. 다른 하나는 첫째 형태의 저고리에서 소매 길이만 좀 짧게 하여 7부 정도로 만든 저고리로서 주로 생산활동과 무술훈련 및 그밖의 민첩한 동작을 요하는 여러 가지 생활에 널리 이용되었다. 또 다른 하나의 저고리는 품과 소매의 너비가 필요 이상 넓고 소매 길이도 위에서 지적한 저고리보다 더 긴 것이었는데 소매 길이가 지나치게 길고 큰 소매 끝에 흰 한삼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옷은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라는 뜻에서 ‘대수삼’이라고 하였다. ‘대수삼’은 당시 귀족들이 위세를 부리며 그들의 옷차림을 백성들의 옷차림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저고리의 소매가 손을 가릴 정도로 길고 한삼까지 달려 있는 것은 평상시에 손을 소매 밖으로 보이는 것을 ‘부끄러운’ 일, ‘천한’ 일로 여긴 당시 양반귀족들의 도덕적 관념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귀족들도 무술을 익히거나 사냥을 하는 등의 활동적인 생활을 할 때는 소매가 짧고 몸에 꼭 맞는 저고리를 입었다.

삼국시대 남자 저고리에는 깃, 도련, 소매끝동 등에 저고리 바탕색과 다른 색의 좁은 천을 덧달았는데 이것을 ‘선(?)’이라고 하였다. 선은 옷에서 빨리 더러워지거나 해지는 부위에 덧닮으로써 깃이나 도련, 소매끝동 등을 수시로 갈아대어 옷을 항상 깨끗이 오래 입을 수 있게 하였다.

고구려고분벽화 자료에 의하면 여자들의 저고리는 물론 거의 모든 남자들의 저고리와 그밖의 옷들에도 선이 있는데 이것은 삼국시대에 옷에 선을 대는 것이 일반화된 풍습이었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예로부터 알뜰히 살아온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생활관습의 일단을 잘 보여 준다.

남자 저고리에 선을 댄 부위와 선의 색깔은 일정하지 않았다. 고분벽화 자료에 의하면 저고리의 깃에만 선을 댄 것이 있는가 하면 깃과 소매끝동 또는 깃과 소매끝동 및 도련에 선을 댄 것도 있으며 심지어 깃, 소매끝동, 도련, 어깨부위에까지 선을 댄 것도 있다. 그러나 모든 남자들의 저고리에 공통적인 것은 깃에만은 예외없이 선을 댄 것이었다. 이것은 깃부위가 다른 부위보다 더 빨리 더러워지고 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정’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계승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깃선은 바로 동정의 시초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깃 외의 다른 부위에 선을 대는 것은 개별적 사람들의 기호와 취미에 따라 각기 달랐다. 선의 색깔로는 흰색, 검은색, 붉은밤색, 녹색, 붉은색, 황색 등 여러 가지를 썼는데 사람들은 진한 색을 더 많이 이용하였다. 그것은 진한 색이 더러워져도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었겠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색깔 선택에서 부드럽고 연한 저고리색과 대조를 이루면서 선의 아름다움, 옷의 맵시있고 단정한 면모를 더 잘 나타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실지로 선을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옷의 아름다움을 돋우기 위한 데도 이용하였던 것이다.

수산리벽화무덤 서쪽벽 벽화에 보이는 남자 저고리에는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선을 댔으며 덕흥리고분벽화에 보이는 남자 저고리들에는 황색 바탕에 녹색 선을 대었다. 이러한 실례는 안악3호무덤 벽화와 춤무덤 벽화를 비롯한 다른 고분벽화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벽화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의 색깔을 저고리의 바탕색과 대조시킴으로써 옷의 아름다움을 더한층 돋우어 주었다. 이 시기 남자 저고리 색깔은 황색, 붉은밤색, 검은색, 암재색, 암녹색, 녹색, 푸른색, 미색, 붉은색, 흰색 등 매우 다양하였다. 벽화의 인물도를 보면 일반 백성들은 주로 황색 계통의 옷을 많이 입은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흔히 베옷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색깔의 저고리들은 주로 고급비단으로 지은 것인데 이런 옷은 귀족관료들이 입었다.

이 시기 남자 저고리에는 무늬있는 옷도 적지 않았다. 저고리 무늬에는 둥근무늬, 쐐기무늬, 선무늬, 방형무늬, 점무늬, 능형무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러한 무늬들은 주로 홑무늬로 장식하였으나 몇 가지를 배합하여 장식한 것도 있었다. 벽화 자료에 의하면 일반 백성들의 저고리에는 점무늬만이 있고 그밖의 무늬들은 주로 귀족들의 저고리에서 볼 수 있다. 무늬 색깔들은 대체로 검은색, 붉은밤색, 붉은색, 흰색 등인데 벽화들에서 일반 백성들의 저고리 무늬색은 검은색과 붉은밤색이 많고 그밖의 색은 주로 귀족들의 저고리 무늬색으로 쓰였다.

삼국시대의 남자 곧은깃저고리는 그후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큰 변화없이 계승되었다. 다만 통일신라에서 한때 저고리를 ‘내의(內衣)’라고 부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저고리를 겉옷 즉 표의(表衣) 안에 입는 옷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도 저고리를 삼국시대에서처럼 ‘삼’, ‘유’ 등으로 표기하거나 새로 ‘의대(衣對)’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의대’라는 말은 삼국시대 저고리를 가리키는 우리말 고유어였던 ‘위해’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남자 저고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종래의 긴 저고리가 그대로 계승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래의 긴 저고리가 변화되어 길이가 짧아지고 깃이 사선으로 된 것이었다.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고 있는 청동거울인 ‘엽호헌원사릉경’의 뒷면에는 4명의 남자가 사냥을 하는 장면이 형상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길이가 허리를 넘는 긴 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매었다. 또한 같은 고려시대 유물로 알려져 있는 청동거울인 ‘보각인물팔릉경’의 뒷면에 하늘소를 탄 양반과 그 뒤에서 우산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시중군으로 보이는 인물이 형상되어 있는데 이 시중군도 허리를 넘어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긴 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매었다. 이 청동거울들에는 돋을새김수법으로 사람들을 형상하였기 때문에 옷색깔을 알 수 없고 또 깃, 소매끝동, 도련 등에 선이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하기 어렵지만 저고리 형태는 모두 고구려고분벽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 저고리와 별로 차이가 없다.

고려시대에 남자들이 긴 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매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옛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에서 진사의 옷차림은 “검은 명주로 만든 ‘구’를 입고 검은 띠를 띠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하였으며 재가화상의 옷차림은 “가사를 입지 않고…흰 모시로 만든 착의(窄衣)를 입고 검은 비단으로 허리를 묶었다”고 하였다.

물론 『고려도경』에 나오는 ‘구’와 ‘착의’가 겉옷인지 저고리인지는 명백치 않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옷차림 풍습에서 겉옷에 허리띠를 맬 경우 저고리에도 허리띠를 맸고 겉옷에 고름을 매면 저고리에도 고름을 맸던 것으로 보아 『고려도경』에 나오는 옷이 저고리가 아니라 겉옷이라고 하여도 고려 사람들이 저고리에 허리띠를 맸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몇 가지 자료들을 통하여 고려시대에도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던 남자 긴 저고리가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허리띠를 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남자들은 종래의 긴 저고리와 다른 짧은 저고리도 입었다. 고려 정수병인 ‘동제금상감호반경물문정병’에는 배를 탄 남자인물이 형상되어 있는데 이 남자인물이 입은 저고리는 길이가 허리까지 오는 것으로서 종래의 긴 저고리보다 길이가 짧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짧은 저고리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에 남자의 짧은 저고리가 있었다는 것은 또한 고려 이전 시기와 조선 초기의 남자 저고리들을 대비하여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이전 시기인 통일신라에서 정한 옷규정에는 여자옷 규제사항에만 단의(짧은 저고리)가 있고 남자옷 규제사항에는 단의에 관한 조항이 없다.★

또한 조선 초기의 남자 저고리를 보면 전반적으로 길이가 짧아졌으며 깃도 완전히 사선으로 된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말기에는 이미 남자 저고리가 전반적으로 짧아졌으며 고려 초중엽부터 짧은 저고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에 남자의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허리띠는 필요없게 되었고 그 대신 고름으로 옷을 몸에 고정시키는 형식이 새롭게 도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깃도 고름을 매는 데 편리하게 직선적인 형태로부터 사선으로 된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 짧은 저고리가 일반적인 옷으로 되면서 남자의 긴 저고리는 점차 덧저고리로 이용되어 후세까지 전해졌다.

조선시대에 와서 저고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새롭게 불려진 저고리의 이름은 ‘적고리(赤古里)’, ‘소오자(小?子)’, ‘포오(袍?)’, ‘삼아(衫兒)’, ‘소대(小對)’, ‘적삼(的衫)’ 등이었다. 이밖에 일시적으로 또는 국한된 범위에서 불린 딴이름도 있었다.

이러한 각이한 이름들은 웃옷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거나 종래부터 불러오던 고유한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적고리’는 고유한 우리말인 저고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2년(1420년) 9월 무인조에 ‘홍단자 적고리’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후 1493년에 출판된 『악학궤범』 여기복식조와 그밖의 기록들에도 ‘적고리’라는 기록이 보인다. 물론 ‘적고리’라는 이름이 1420년에 와서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여 이때에 비로소 생긴 이름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그 이전 시기부터 백성들 속에서 통용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소오자’는 저고리를 ‘오’인 창의나 도포 등 겉옷의 작은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포오’는 『사례편람』 ‘상례습’에서 ‘속칭 적고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저고리를 부르는 딴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삼아’는 ‘삼’이라는 뜻으로서 조선시대 이전부터 웃옷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소대’는 1466년경의 저고리에 씌어진 묵서에 보이는 말이다. 글자의 뜻으로 보아 ‘소대’는 ‘소의대(小衣對)’의 준말로 볼 수 있다. ‘의대’는 저고리를 ‘위해’, ‘우티’ 또는 ‘우테’라고 부른 고유한 우리말의 한자 표기라고 볼 수 있다. ‘적삼’은 몸에 직접 닿는 저고리라는 뜻으로서 속옷 없이 직접 입는 웃옷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저고리에 대한 이름이 여러 가지로 불려졌으나 조선 중말엽에 와서 고유한 우리말이었던 ‘적고리’가 웃옷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고착되었다.

조선시대 남자 저고리의 형태는 초기에 고려 말기의 것을 이어받았으나 그후에 깃과 길이 등이 얼마간 변하였다. 우선 남자 저고리의 깃이 변하였다. 조선 초기 남자 저고리 깃은 섶 밖으로 나가 있었고 깃 끝은 모가 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변하면서 깃이 섶 안쪽으로 들어갔으며 깃끝이 곡선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의 남자 저고리 깃이 밖으로 나가 깃끝이 모가 난 것은 삼국시대의 긴 저고리가 고려시대에 와서 짧아지면서 수직으로 저고리 끝까지 내려오던 곧은 깃이 가슴부위까지 오는 사선 깃으로 달라진 결과 생긴 현상이었다. 그후 깃이 미적으로 다듬어지면서 점차 섶 안쪽으로 들어갔으며 깃끝도 곡선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매우 서서히 진행되었다. 1979년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짓골에 있는 17세기 중엽의 무덤에서 나온 남자 저고리와 17세기 전반기의 유물인 광해군의 저고리가 바로 그러한 중간형의 깃을 가진 저고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저고리 깃이 섶의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간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18세기 후반기 사이였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18세기 후반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평안남도 성천군 장림리의 한 무덤에서 1983년에 발굴된 3점의 남자 저고리를 통하여 증명할 수 있다. 이 무덤에서 나온 남자 저고리들의 깃은 모두 섶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가 있으며 깃의 끝부분이 곡선을 이루었다.

다음으로 남자 저고리의 길이도 변화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미 짧아지기 시작한 남자 저고리는 17세기 중엽부터 변화과정이 더욱 빨리 진행되어 조선 말기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정도의 길이로 줄어들었다. 또한 남자 저고리의 소매 배래기와 도련 등도 직선적인 것으로부터 점차 곡선미를 띠는 방향으로 달라졌다. 그리고 저고리 고름도 조선 초기에 비해 조선 말기에는 훨씬 길어지고 넓어지면서 장식적인 의의가 강조되었다.

남자 저고리의 변화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또한 동정이 생겨난 것이다. 동정은 저고리 깃에 좁은 흰 선을 덧달아 주로 깃부위를 항상 깨끗하게 하기 위한 데서 생겨났다. 동정은 민족옷에 고유한 특징적인 요소로서 남녀 저고리와 겉옷에 달았으며 더러워지면 수시로 갈아댈 수 있게 되었다. 동정이 언제부터 생겨났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16세기 초의 것으로 알려진 여러 점의 저고리들에 동정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동정을 다는 풍습이 16세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동정은 삼국시대에 옷의 깃, 끝동, 도련 등에 댄 선과 그 실용적인 목적이 같고 미적인 효과에서도 통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을 대는 풍습에서 유래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오랜 기간에 걸쳐 변천된 남자 저고리의 모양은 대체로 18세기 후반기에 와서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남자 저고리로 고착되었다. 남자 저고리의 형태는 계절과 연령, 신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다 같았으나 저고리의 종류에는 계절에 따라 적삼, 깨끼저고리, 겹저고리, 누비저고리, 솜저고리 등이 있었다.

적삼은 홑저고리라고도 하였는데 무명, 명주, 베 등의 홑옷으로 지은 옷으로서 주로 더운 여름철에 입었다. 깨끼저고리는 ‘사’, ‘모시’ 등을 옷감으로 하고 등솔기를 곱솔로 하여 박은 홑저고리의 한 종류였다. 등솔기를 곱솔로 하여 박은 것은 바느질로 꿰맨 부위가 쉽게 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겹저고리는 무명, 베, 모시, 명주, 비단 등의 옷감을 겹으로 하여 지은 옷으로서 주로 봄, 가을에 입었다.

누비저고리는 비단이나 무명 등의 옷감을 겹으로 하여 솜을 얇게 둔 다음에 누빈 것이었다. 옷에 솜을 두어 누벼 짓는 풍습은 이미 17세기 중엽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그것은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짓골에서 출토된 17세기 중엽의 옷들 중에 솜을 얇게 두어 누빈 등거리가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옷을 누벼 짓는 것은 솜을 둔 옷이 쉽게 해지지 않도록 하며 또 솜이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누비저고리를 차렵저고리라고도 하였는데 주로 날씨가 아직 찬 이른봄이나 늦가을에 입었다. 솜저고리는 우리나라에서 목화 재배가 시작된 14세기말 이후에 생긴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풀솜을 둔 저고리가 있었으므로 솜저고리의 연원은 오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솜저고리는 겨울용 옷으로 널리 이용되었는데 겨울날씨가 찬 중부이북지방 주민들은 솜을 두툼하게 두어 입었다. 특히 노인들은 추위를 더 타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 며느리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솜을 두툼하게 두어 지은 솜옷을 마련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조선시대 남자 저고리에는 삼국시대의 옷처럼 선을 대지 않았으나 소매 끝동에 흰 한삼을 좁게 대는 현상이 한때 있었다.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짓골에서 출토한 저고리와 광해군의 저고리가 바로 그런 저고리였는데 이런 관습은 당시 양반관료들 속에서만 유행되었다. 통치계급들이 저고리 소매 끝에 흰 한삼을 덧댄 것은 손을 가리기 위해서였는데 그것은 윗사람 앞에 나설 때 손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로 여긴 양반관료들의 도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관념은 18세기 이후에 점차 희박해지면서 저고리 소매 끝동에 흰 한삼을 대는 현상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노동 그 자체가 생활이었고 언제나 일을 하여야 하였으므로 일상생활에 불편한 한삼을 저고리 끝동에 달 필요가 없었다.

우리나라 남자 저고리 색깔에는 흰색, 재색, 밤색, 푸른색 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흰색이 많았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베, 모시, 무명으로 지은 흰 저고리를 많이 입었으나 양반관료들은 흰 저고리 이외에 색깔있는 비단저고리도 입었다. 남자 저고리 무늬는 비단으로 지은 옷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대체로 식물무늬가 많았고 여기에 붕어와 같은 동물무늬나 기하무늬, 글자무늬 등이 배합된 것도 있었다. 실례로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짓골에서 출토된 17세기 중엽의 남자 저고리에는 나뭇잎, 부평초와 같은 식물무늬와 붕어무늬, 바둑무늬, ‘卍’형무늬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남자 저고리의 무늬들은 저고리 바탕색과 같은 계열의 색깔이나 그보다 좀 진하거나 연한 색으로 형상한 것이 특징이어서 여자 저고리에 비해 전반적으로 침착하고 은근한 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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