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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관 > 옷차림풍습 > 일상옷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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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긴 겉옷
일상시에 입던 남자의 긴 겉옷에는 두루마기, 소창옷, 중치막, 학창옷, 심의, 도포, 전복(쾌자) 등이 있었다. 옛날에는 일반적으로 긴 겉옷을 ‘포(袍)’라고 표기하였으나 포의 종류가 늘어나고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이름들이 생겨났다. 과거에 있었던 다양한 포들 가운데서 역사가 오래고 널리 일반화되어 대대로 계승되어 온 포는 두루마기였다. 두루마기란 용어는 두루 막는 옷이라는 뜻을 가진 고유한 우리말인데 한자 표기로는 처음에 일반적으로 ‘포’라고 해오다가 18세기초부터 ‘두루 주(周)’자에 ‘옷 의(衣)’자를 써서 ‘주의(周衣)’라고 하였다. 때문에 ‘두루마기’라는 고유어는 19세기까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두루마기는 저고리의 길이를 무릎 아래까지 길게 한 겉옷이었다. 그러므로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언제나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변화 발전하였다.

고구려고분벽화 자료에 의하면 이미 삼국시대에 저고리의 길이를 더 길게 한 겉옷인 두루마기가 있었다.
이 시기 두루마기의 깃은 직선으로 아래 도련까지 내려왔고 좌우로 여며 입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겉옷을 입은 다음에는 허리띠를 매었다.

또한 두루마기에도 저고리나 바지에서처럼 선을 달았다. 두루마기의 깃과 도련, 소매끝동 등에 옷바탕색과 다른 색천을 좁게 덧달아 줌으로써 빨리 더러워지거나 해지는 곳을 수시로 갈아댈 수 있게 하였다.
삼국시대의 두루마기는 그후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큰 변화없이 계승되어 오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곧은 깃으로부터 점차 사선 깃으로 변화되었다. 깃의 이러한 변화는 당시에 남자 저고리의 깃 변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사선 깃이 아직은 겉옷의 섶과 길의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고려시대 두루마기의 형태를 보여 주는 유물은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태봉리에 있는 문수사의 금동여래좌상에서 나온 흰 모시포이다. 이 겉옷은 소매가 반소매로 되어 있고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을 잡았으며 밑을 터지게 한 것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삼국시대의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다만 깃이 가슴부위까지 사선으로 내려오다가 끊긴 듯한 모양을 한 점이 삼국시대의 두루마기와 차이난다.

두루마기는 그후 조선시대에 와서 깃이 미적으로 더 다듬어지면서 섶과 길의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갔으며 새로 고름이 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저고리의 깃이 섶과 길의 안쪽으로 들어간 시기와 일치하였다. 두루마기는 17세기까지만 하여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 주로 일반 백성들이 널리 입던 겉옷이었다. 그러나 그후부터는 양반관료들 속에서도 널리 보급되었다. 그것은 1704년에 국왕(숙종)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입는 ‘주의’를 양반관료들이 입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명령을 내린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두루마기가 일반 백성들은 물론 양반관료들 속에서까지 일반화된 것은 통치체제가 약화되고 계급신분제도가 문란해진 것과 관련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갑신정변 이후에는 양반관료들 속에서 소매가 넓고 뒷자락이 덧붙은 도포와 옆이 터져 거추장스러운 창옷보다 편리한 두루마기를 즐겨 입게 되었으며 그들의 주요한 나들이옷으로, 집안에서 손님접대시 의례히 입는 평상예복으로 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두루마기의 형태는 같은 시기의 남자 저고리의 길이만 더 길게 한 것이었으므로 깃, 동정, 고름 등은 저고리의 것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다만 두루마기를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고도 편안히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겨드랑이 아래에 무를 덧대어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넓어지게 하였을 뿐이다. 두루마기는 베, 모시, 무명, 명주, 비단 등 여러 가지 옷감으로 지었는데 홑두루마기, 겹두루마기, 누비두루마기, 솜두루마기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모두 같았으며 재료와 짓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홑두루마기는 주로 더운 여름철에, 겹두루마기는 늦은봄과 이른 가을철에, 누비두루마기는 솜을 얇게 두고 누빈 것이므로 이른봄과 늦가을에, 솜두루마기는 추운 겨울철에 입는 것이었다.

과거에 두루마기에는 대체로 흰색이 많았으나 나이든 사람들이 입는 두루마기에는 옥색, 남색 등도 있었다. 어린이들의 두루마기는 여러 가지 고운 색깔로 하거나 색동을 달아 알록달록하게 지었는데 거기에는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귀엽게 여기는 우리 부모들의 소박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창옷은 양쪽 겨드랑이 밑에 무를 대지 않고 터지게 한 겉옷이었다. 창옷이라는 이름이 옛기록에 나타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고려사』‘곽상전’에 ‘학창’이라는 옷의 이름이 보이는데 학창은 학창옷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려 때에 이미 창옷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창옷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시대의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창옷에는 소창옷, 중치막, 학창옷 등 세 가지가 있었다. 소창옷은 깃, 동정, 소매, 길이 등이 두루마기와 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겨드랑이 아래에 무를 대지 않고 곧추 터지게 한 것이 두루마기와 구별되었다. 고름은 좁고 짧았으며 안고름과 겉고름이 있었다. 소창옷은 대체로 모시, 무명, 명주 등으로 만들었는데 주로 겹으로 하였으나 겨울용으로는 솜을 넣어 누빈 것도 있었다. 색깔은 대체로 흰색이었지만 옥색도 많았다. 백성들은 소창옷을 두루마기처럼 겉옷으로 입었는데 민첩한 행동을 할 때에는 두 폭의 앞자락을 등뒤로 돌려 매어 간편하게 하였다. 그러나 양반관료들은 소창옷을 중치막 밑에 입는 옷으로 이용하였다.

중치막은 소창옷 위에 껴입는 겉옷이었다. 그러므로 소창옷보다 품이 넓으며 소매도 넓고 길었다. 그 형태는 기본적으로 소창옷과 같으나 소매가 대단히 넓고 길며 뒤등솔기가 아래로부터 깊숙이 터진 점이 차이났다. 그러므로 소창옷의 경우 앞이 두 갈래로 되고 뒤가 한 갈래로 되어 모두 세 폭이었지만 중치막은 앞과 뒤가 두 갈래씩으로 되어 모두 네 폭이었다. 중치막의 소매는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점차 넓어지는 경향을 띠고 변하였으며 고름도 조선 말기에 와서는 넓고 길어졌다. 중치막은 모시나 무명, 명주, 비단 등으로 계절에 맞게 지었다. 색깔은 대체로 흰색이었지만 옥색도 많았다. 중치막은 주로 통치계급들이 일상시에 소창옷 위에 껴입는 겉옷으로 이용하였으나 18세기 말~19세기 초 정조, 순조 통치 연간에는 문무관들의 조복으로도 이용된 일이 있었다.

학창옷은 중치막과 형태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깃과 앞섶, 밑단, 뒤의 터진 선 등에 검은 선을 댄 것이 달랐는데 이것을 학과 비유하여 학창옷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 짐작된다. 이러한 창옷들은 1884년 갑신옷개혁 때 다른 넓은 소매 겉옷과 함께 폐지되고 민간에서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다.

도포는 중치막과 비슷하나 등뒤에 전삼(네모진 헝겊)을 덧대어 뒤를 두 겹으로 하였고 소매가 대단히 길고 넓었으므로 손이 완전히 가려졌다. 도포를 언제부터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조실록』에 전 승문원 정자 이홍망이 초록색 깃도포를 입고 다니다가 의금부에 단속된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 이전 16세기경에 일부 양반관료들 속에서 도포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도포를 유물을 통해서 보면 소매는 그다지 넓지 않으나 대단히 길다. 그리고 등뒤에 덧댄 전삼의 밑단이 윗단보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후 도포의 소매는 점차 넓어지면서 길이는 상대적으로 짧아졌으며 전삼도 밑단의 너비가 좁아지면서 19세기경에 와서 윗단과 아랫단의 너비가 거의 같은 정도로 되었다. 도포의 소매와 전삼의 이러한 시기적인 변화는 당시 사람들의 시대적인 미감의 변화에서 생긴 것이었다.
도포는 계절에 관계없이 무명, 베, 모시, 사 등을 옷감으로 하여 홑옷으로 지었는데 특히 시원하고 가벼운 모시로 많이 지었다. 도포를 사철 홑옷으로 지은 것은 이 옷이 추위를 막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의 특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옷으로 이용된 것과 관련되었다.

조선시대는 초기에 백성들이 도포를 입는 것을 금지하고 통치계급들만 입게 하였으나 그후 중문경무(重文輕武)사상이 강해지면서 성종 11년(1480년)에는 무관들도 도포를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통치계급 내에서도 도포에 띠는 색실띠로써 벼슬 등급과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당상관은 분홍색 띠 혹은 붉은색 띠나 자주색 띠를, 당하관은 푸른색 띠나 풀색 띠를 띠였고 상주는 흰 띠를 띠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와서 신분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이러한 규정은 그대로 준수되지 못하고 젊은이는 자주색 띠를, 중년층은 남색 띠를, 노인들은 옥색 또는 재색 띠를 띠는 것이 일반적 관례로 되었다. 그리고 도포를 입을 때는 안에 소창옷이나 두루마기를 먼저 입고 그 위에 도포를 입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심의는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이었다. 그 모양은 시기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 말기까지 전하여 온 심의는 대체로 깃이 직선으로 도련까지 내려왔으며 오른쪽으로 여며 입게 되어 있었다. 소매는 크고 특히 허리 아래가 대단히 넓었으므로 마치 웃옷과 치마를 연결시킨 것처럼 보였다.

심의는 주로 가는 베나 흰 단 등으로 지었는데 깃, 도련, 소매끝동 등에 검은 선을 단 것이 특징이었다. 옷길이는 땅에 닿을 만큼 길었으며 겨드랑이 아래를 약간 터지게 한 것과 터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입는 사람의 기호와 시대적 미감의 변화에서 생긴 것이었으며 심의가 다른 겉옷들에 비해 특별히 크고 길게 만들어진 것은 유학자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반비(半臂)는 소매가 없고 맞섶이며 무가 없고 겨드랑이 가까이까지 옆선을 터지게 한 겉옷이었다. 반비라는 말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반소매옷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반비라는 옷이 나온 초기에는 반소매옷이었는데 언젠가 점차 소매없는 옷으로 변하였음을 말해 준다. 반비라는 이름이 옛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통일신라에서 834년에 제정한 복식금령에서부터였다. 이 금령에 의하면 반비는 4두품 이상의 남녀들만 입을 수 있었으며 여자의 반비는 한 등급씩 높은 남자 귀족들의 반비와 맞먹는 고급스런 재료로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반비는 그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다. 『태종실록』에 태조가 비단으로 지은 반비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도 통치자들 속에서는 반비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후반기에는 나장과 같은 최하급의 벼슬아치들도 반비를 입고 있었다.

반비는 ‘답호’ 또는 ‘쾌자’라고도 불렸다. 또한 다른 겉옷들에 비하여 활동에 편리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는 군사들의 겉옷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이리하여 ‘전복’, ‘전포’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반비가 전복으로 통용되면서 그 본래의 이름은 자취를 감추어 조선 후반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에 반비와 전복이 다른 옷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반비는 곧 전복이었다.

반비가 곧 전복이었다는 것은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9세기의 학자였던 허전(許傳)은 『성재집(性齋集)』에서 “반비는 깃이 배자와 같고 소매가 없으며 양겨드랑이가 붙어 있지 않은데 일명 답호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반비의 이러한 형태는 유물로 전해오는 전복의 형태와 꼭 같다.

이로부터 반비는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있었던 옷으로서 그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반비라는 이름으로 불려오다가 점차 답호, 전복 등으로 불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비는 통치계급들이 입던 긴 겉옷 가운데서 가장 간편하고 보기에도 경쾌한 감을 주는 옷이었으므로 조선 후반기에 와서는 통치계급들의 일반적인 일상옷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리하여 쾌자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전복 유물들을 종합해 보면 17세기 말~18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전복에는 겨드랑이 가까이까지 옆선을 약간 터지게 하고 뒷솔기를 허리 아래로 길게 터지게 한 것도 있었으나 그후 뒷솔기를 터지게 하지 않고 겨드랑이 가까이까지 옆선을 깊숙이 터지게 한 것으로 고착되었다. 조선 말기의 전복은 대체로 깃이 없고 맞섶이며 호박단추나 매듭단추를 하나 혹은 두 개 정도 달아 채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더 잘 입히고 곱게 단장해 주려는 어머니들의 심정에서 어린이용의 전복에는 깃과 동정을 달아 주기도 하였고 깃부분을 색천쪼가리로 곱게 장식하기도 하였다.

전복은 일반적으로 짙은 남색의 사, 초 등 비단 옷감을 홑옷으로 하여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들에게 검은색이나 옥색 전복을 입힘으로써 신분과 관직상의 차이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남자들이 일상시에 입던 겉옷에는 덧저고리, 마고자, 등거리(배자) 등의 짧은 겉옷과 두루마기, 소창옷, 중치막, 학창옷, 도포, 심의, 반비(전복) 등 긴 겉옷이 있었다. 이 여러 가지 종류의 겉옷들 중에 덧저고리, 두루마기, 소창옷 등은 주로 일반 백성들이 오랜 옛날부터 추위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 이용한 옷이었으며 생활에도 편리한 겉옷이었다.

두루마기나 소창옷은 간편한 옷이었으므로 양반관료들도 이용하였으나 일반 백성들과 유별하게 옷차림을 하기 위하여 두루마기나 소창옷 위에 중치막이나 도포 혹은 반비(전복) 등을 덧껴입었다. 등거리(배자), 마고자 등도 주로 양반들과 부유한 계층들이 집안에 있을 때에 일상옷으로 이용하였고 그밖의 중치막이나 학창옷, 도포, 심의, 반비(전복) 등은 양반들이 손님을 대할 때나 바깥출입을 할 때에 입었다.

중치막과 학창옷, 도포, 심의 등은 방한용 옷으로도 이용되었으나 그보다 주로 통치자들이 권세를 뽐내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 소매가 길고 넓었으며 품도 넓었기 때문에 생활에는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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