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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발생과 발전
마을의 위치와 유래
마을의 기능과 관습
상호부조풍습
마을풍습의 계승발전
북한지역정보넷 마을의 위치, 그 이름과 유래
마을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에 편리한 곳에 자리잡고있었다. 생활에 유리한곳을 찾아 생활터전을 마련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성적인 요구이다. 여러 지방에서 발굴된 원시마을유적들과 후세의 자연부락의 자리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마을유적들인 금탄리유적, 범의구석유적, 남경유적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유적들은 대체로 강기슭이나 야산지대, 바다기슭에 자리잡고있으며 그 이후시기의 원시유적인 경우에도 그와 같았다. 이것은 당시 우리 선조를 이룬 사람들이 원시농업이나 물고기잡이, 짐승사냥 등의 생산활동을 벌려 생활수단을 마련하는 데서 그러한 지형조건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후세의 자연부락들의 위치를 보아도 모두 사람들이 살기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와 분업이 발전하여 거주지역이 확대되는데 따라 마을의 터도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예를들면 농사에 유리한 평야지대를 개간하였을 경우에는 거기에 새로운 마을이 생기며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상품유통이 활발히 진행되는곳에는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마을이 생겨나기마련이었다. 이것은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가 장성함에 따라 마을의 터도 부단히 개척되고 확대되며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초 우리나라 마을의 자리형편을 엿볼수 있는 조사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표와 같다. 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마을은 각이한 지형에 자리잡고있으나 일정한 경향성을 띠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수가 평야에 위치한 마을수보다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대적특성이 반영될 것이라고 볼수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산을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는 전통적인 풍습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구려시기에 산과 골짜기에 의지하여 사는 풍습이 있은 것은 그것이 예로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오고있는 풍습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을이 발생하여 그것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고장을 다른 마을과 구별하기 위하여 마을이름을 지어부르게 되었다.

처음 모계씨족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생활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마을이름이 절실한 것으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활동이 씨족적인 울타리 즉 한마을안에서 진행되었거나 한두 개의 이웃씨족과의 연계를 가지고 생활을 진행한데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마을이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씨족명과 같았을 것이다.

점차 마을이 늘어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이웃 마을과의 교제와 문물교류를 활발히 벌이게 되었으며 활동범위를 넓혀나갔다. 마을의 증대와 사람들의 생활범위의 확대는 마을과 마을을 구분할수 있는 고유한 마을이름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교제수단으로서의 언어의 발전은 마을이름을 지어 부를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이러한 생활적 요구와 가능성이 조성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마을이름을 지어 부르게 되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최초의 마을이름은 벌, 산, 강 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고장의 지형지물을 가장 주요한 표식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을 이를 때 흔히 ‘나는 벌에서 산다’, 혹은 ‘산에서 왔다’, ‘강에서 산다’ 등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실례로 신라를 ‘새벌’이라고 했는데 벌이라는 마을이름으로부터 나라이름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이 지어부른 마을이름들은 대부분이 지형지물에서 유래된 것이며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도덕, 신앙, 유적유물, 성씨, 명산, 동식물과 관련하여 마을이름이 생겨난 것도 적지 않다.

우리 선조들은 지형지물과 관련시켜 마을이름을 많이 지었다. 그것은 산, 바위, 돌, 벌판, 섬, 강하천, 샘터, 호수, 나루터, 덕지대, 곶 등과 연관시킨 것이다. 산이름을 따서 지은 마을이름으로서는 고산리, 괴산리, 율산리, 대산리, 말산리, 남산리 등이다. 이러한 마을들에는 반드시 산이 솟아있는 것이다.

바위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마을이름으로서는 기암동, 홍암동 등을 들수 있다. 이것들은 마을근처에 있는 바위이름을 마을이름으로 이용한 것인데 휴암동이라는 마을이름은 오가는 길손들이 쉬는 장소로 이용된 큰 바위라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큰돌을 형상한 마을이름도 적지 않다. 거석리, 석정리, 성석리, 석사리, 석교리, 입석리 등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지난날 평안남도에는 화석리, 입석리, 석교리, 미석리, 안석리와 같이 돌‘석’자를 붙인 마을이름이 많았다. 근세에 와서도 석일리, 석이리, 석삼리, 석사리와 같은 마을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평지를 형상한 마을이름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평야지대의 평지뿐아니라 산간지대의 넓은 평지에도 ‘평’자를 붙인 마을이름이 있었다. 예하면 신평리, 중평리, 천평, 상평, 하평, 평산리 등을 들 수 있다. 『북새기략』(백두산조)에는 “백두산 동쪽 장파의 서쪽 허점이북 각봉이남에 넓고 큰 벌판이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천평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평자가 달린 마을이름 역시 오랜 연원을 가진 것이라고 보아진다.

섬과 관련한 마을이름은 바닷가마을들에 섬‘도’자를 붙인 이름이 많았다.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해안이 아닌 내륙지방의 평지에 섬과 같은 모양의 지형에 자리잡은 마을에도 섬‘도’자를 단 마을이름이 있다. 예를들면 황해북도의 철도리 또는 상도, 하도 등의 마을이름을 들수 있다. 이것은 먼 옛날에 이 일대가 섬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강하천과 관련된 마을이름으로서는 황해남도의 임강리, 황해남도의 삼지강리 등이 있다. 이밖에 마을이름이 강하천과 관련된 실례는 허다하다.

우물 또는 샘터를 의미하는 마을이름으로서는 평안남도의 온정리, 온천리(온천이 솟아오르는 곳이라는 뜻), 황해북도의 냉정동과 한정동 등을 실례로 들수 있다. 호수와 관련된 마을이름으로서는 황해남도의 남호리, 강원도의 서호리, 함경북도의 우호동 등을 들수 있다. 나루터와 관련된 마을이름은 함경북도의 나진, 어대진, 서호진 등 허다한 실례를 들 수 있다. 모래터와 관련된 마을이름으로서는 평안북도의 흑사동, 함경남도의 사리촌, 함경북도의 사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덕지대와 관련된 마을이름은 덕흥리, 창덕리, 곶과 관련한 마을이름으로서 장산곶 등을 실례로 들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특색있는 지형지물에 따라 지어부른 마을 이름이 많았다. 마을이 지리잡고있는 위치와 관련된 마을이름은 동, 서, 남, 북인가 아니면 안인가 밖인가, 상, 중, 하 또는 먼가 가까운가, 앞인가 뒤인가 하는 위치 등이 고려되었다. 위치를 표시한 가운데서 가장 많은 것은 동, 서, 남, 북으로 표시된 마을이름이다. 예를들면 남리, 서리, 북일리 등이다.

다음으로 상, 하로 표시된 마을이름도 적지 않다. 예를들면 지난날 평안남도에는 상동과 하동이 있었는데 상동과 하동이 남쪽과 북쪽에 인접해 있었다. 또한 상리, 하리가 있었는데 상리는 남쪽에 위치하고 하리는 북쪽에 위치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형이 높고낮은 데서 유래된 마을이름이었다. 그리고 노상리와 노하리가 있었는데 이것은 큰길을 기준으로 길위쪽마을을 노상리라고 하였고 길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노하리라고 하였다.

마을이 자리잡고있는 위치가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에 따라 지은 마을이름도 있었다. 우리나라 풍속에 남쪽을 앞이라고 하며 북쪽을 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남향집을 짓고 사는 것이 고유한 풍속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쪽에 있는 마을을 앞마을이라 하였고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을 뒷마을이라고 하였다.

현지조사자료에 의하면 평안남도에는 전어동과 후어동이 있었는데 역시 전어동은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고 후어동은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리고 전이리와 후이리가 있었는데 역시 전자는 남쪽에, 후자는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앞은 남쪽을, 뒤는 북쪽을 가리키는 것이 전통적인 풍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역사유적에서 유래된 마을이름들도 적지 않았다. 그가운데서 성, 창고(옛날 국가양곡이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 봉수대, 시장 등에서 유래된 마을이름들만 간단히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는 산성, 읍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성이 많았다. 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성과 관련된 마을이름이 있었는데 산성이 있는 곳에는 산성리가 있고 토성이 있었던 곳에는 토성리가 있기마련이었다.

평양시와 함경남도에 있는 토성리는 그 실례로 된다. 낙랑구역 토성리에는 먼 옛날 고대시대에 쌓은 토성이 있는데 그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 황해도에는 상성동(성위쪽의 마을이라는 뜻), 하성동(마을이 성아래쪽에 있었다는 뜻), 내성동(성안의 마을이라는 뜻) 등과 같은 성과 관련된 마을이름도 있었다. 이러한 마을이름들은 오늘도 그대로 전해지고있는 것이 적지 않다.

‘창고’와 관련된 마을이름으로서는 동창리(황해남도)가 있는데 창고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회창(평안남도), 북창마을(창고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 신창리(평안남도) 등을 들수 있다. 창고와 관련한 마을이름이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전라도들에서 흔히 볼수 있었다. 이것은 국가의 창고가 주로 병란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양곡을 저축한 것만큼 그것이 국경과 해안방위를 위한 변방에 많았기 때문이다.
봉수와 관련된 마을이름으로서는 봉수리(경기도), 연대곡(평안북도), 봉화재(평안북도), 봉수촌(함경남도) 등을 실례로 들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는 역사유적에서 유래된 마을이름도 적지 않았다.

그밖에 도덕과 관련된 마을이름(은덕리, 효자동), 성씨와 관련한 마을이름(강촌, 김촌, 박촌, 홍촌), 명산지와 관련된 마을이름(삼포동, 마장촌), 명승지와 관련된 마을이름(선유동, 청량리), 상서로운 환상적인 동물과 관련한 마을이름(용산리, 봉학동) 등 여러 가지 마을이름이 있었다. 이처럼 마을이름을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주위환경과 특색있는 지형지물에 따라 지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마을이름을 다른 마을과 구별하기 위하여 특색있게 골라서 지어 불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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