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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일상생활에서 상호부조
조선시대 주민은 마을의 민간조직인 ‘향도’와 ‘계’를 뭇고 상호부조하는 풍습을 이루어놓았다. 민간에서 ‘향도’는 향도성원들 사이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생활조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향도의 유래는 매우 오래다. 고려시대의 기록들에는 주로 불교신자들의 사교적인 교제단체로서의 ‘향도’가 보일뿐이고 일반 주민들의 상호부조조직으로서의 ‘향도’는 고려말기부터 보인다. 『고려사』의 ‘심우경전’에는 우왕(1375~1388년) 때에 당시 계림부윤이 개경에서 온 관리를 위하여 차린 연회를 ‘향도연’같다고 조소한 양반 두사람에게 혹형을 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서술하고 나서 “우리나라 풍속에 계를 결성하고 향불을 피우는데 그것을 향도라고 한다. 서로 윤번으로 연회를 배설하고 남녀노소가 차례로 앉아 함께 마시는데 이것을 향도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민간의 향도가 양반들의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에 매우 천시되었다는 것이다.

민간의 향도에 대한 기록은 그후 『이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들에 많이 전하는 불교신자들의 향도는 당시 불교가 통치자들의 비호밑에 사회의 모든 생활을 지배한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고려말 이전의 민간향도에 대해서는 거의나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데 그것은 민간향도에 대하여 무관심한데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민간의 향도가 기록에 자주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향도에 망라된 성원도 많아지고 향도의 눈에 띄게 되어 여러 지방에서 점차 큰 사회적집단으로 활동한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용재총화』에서 향도성원이 보통 8~9명이며 큰 것은 백여명에 달한다고 한 것은 15세기말에 이르러 그것이 매우 큰 사회적집단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봉유설』에 서울을 비롯하여 지방의 향, 읍과 방, 리마다에서 향도를 결성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6세기경에는 향도가 전국적 범위에서 광범히 보급되었다고 할수 있다.

상호부조조직으로서의 향도는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15세기의 향도에 대하여 『용재총화』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지금의 풍속은 날로 점점 야박하여지는데 오직 향도만은 아름답다. 대개 이웃하여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다 서로 모여 회합을 가지는데 적은 것은 7~9명, 많은 것은 백여명에 달한다. 매달 서로 바꾸어가면서 술을 차려마시는데 상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같은 향도사람들이 상복이나 관 또는 횃불, 음식 등을 갖추어주며 혹은 상여줄을 메어 묘를 만들고 사람마다 석달복을 입는데 이것은 참으로 후한 풍습이다.”

이 자료에 잘 반영되어있는바와 같이 향도의 기능은 우선 향도성원들의 친목을 두텁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기능은 ‘향도연’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향도연은 매개 향도성원들로부터 비용을 모으거나 개별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공동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 매 성원들이 돌림으로 차리는 ‘연회’였다. 물론 향도의 기능은 연회가 기본이 아니었으며 연회를 통하여 성원상호간에 친목을 두텁게 하고 서로 화목을 도모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향도의 기능은 다음으로 상사일을 서로 부조하는것이었다. 향도성원들 가운데서 상사가 났을 때에는 모든 성원들이 공동으로 상복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관을 만들고 상여를 메고 매장까지 하는 등 상사때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향도성원들이 맡아하였다. 상사가 났을 때에 향도를 동원시켰다는 기록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는데 실례로 15세기초의 기록에는 마을마다 사람들은 다 향도를 결성하고 매장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사일을 서로 돕는 것은 향도의 주요한 기능이었다. 향도의 기능에는 후세에 내려오면서 향도연은 없어지고 다만 상사때에 부조하는 풍습만이 향도가 존재하는 전기간 기본으로 남아있었다. 근세까지 함경도일대에서 상여계, 혼상계를 향도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향도는 또한 성원들의 허물을 고쳐주며 예의로써 서로 사귀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당시 기록에 “지금 민간에는 향도라는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을 서로 바로 잡아주고 예절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서로 도와준다”고 하였다. 마을에서 향도가 수행한 이상과 같은 기능들은 향도가 당시 상호부조적인 성격을 띤 민간조직이었다는 것을 실증해준다.

일상생활에서 상호부조조직으로서 맺어진 ‘계’는 우리나라의 넓은 지역에 보급되어 있었다. 계는 일반적으로 계원들 사이에 유무상통하고 서로 도우며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공동생활조직이었다. 계를 뭇는 풍습의 유래에 대하여 잘 알 수 없으나 고려말엽의 기록에 ‘향도계’가 씌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시기부터 전하여졌다고 할수 있다.

계풍습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생산과 분업이 앞선 시기에 비하여 확대발전하고 경제문화 생활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진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각이한 사회경제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속에서 여러 가지 계를 뭇게 되고 그 수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여 조선시대의 기록들에는 계와 관련한 자료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다만 ‘계’라는 명칭만이 전할뿐이며 계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들에는 윤곽적으로나마 상호부조조직으로서의 계의 조직구성과 성격 및 내용을 가늠할수 있는 자료들이 전해오고 있다.

『지봉유설』에서는 우리나라 풍속에 중앙과 지방의 향, 읍, 방, 리들에서 모두 계를 뭇고 서로 돕는다고 하였으며 16세기의 사람인 유희춘의 『미암일기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숙종실록』에도 계와 관련한 기록이 여러곳에 보인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계풍습은 조선시대, 특히 16~17세기에 이르러 전국적 범위에서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계와 관련한 기록들과 현지조사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각이한 성격과 목적을 가진 여러 가지 형태의 계조직이 수많이 보급되어 있었다.

‘계’는 계성원들의 물질문화생활의 복리를 증진시키며 혹은 마을생활의 이익을 도모하는 등 그 목적과 범위가 대단히 크고 광범하였다. 예하면 농업을 비롯한 생업의 발전, 마을공동생활의 향상, 지식의 보급과 교육의 장려, 도덕풍습의 쇄신, 근면성과 검박성의 장려, 자금의 융통, 이웃간의 부조와 친목, 문화오락의 장려 등 모든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1920년초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존재한 계의 총수는 약 2만에 달하였으며 그 성원의 총수는 80여 만명에 이르렀다. 계의 이름만 하여도 약 300여 가지를 헤아렸다. 이것은 당시 계가 사회생활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수많은 계들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인 계들을 부문별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수 있다.

① 농업생산을 서로 돕기 위한 계에는 ‘농계’, ‘몽리계’, ‘농구계’, ‘보계’ 등이 있었다.
② 관혼상제를 서로 돕기 위한 계로서 대표적인 것은 ‘관례계’, ‘혼인계’(혼계), ‘혼상계’, 상계, ‘장계’, ‘상포계’, ‘동갑계’, ‘환갑계’, ‘노인계’, ‘위친계’ 등이었다.
③ 교육, 문화오락과 관련한 계로서는 ‘학계’, ‘흥학계’, ‘양사계’, ‘책계’, ‘유린계’, ‘사계’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어있은 것은 ‘학계’였다. 지난날 대다수의 주민들과 그 자제들에게는 배움의 길이 막혀있었으므로 그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공동으로 글방을 차려놓고 글을 배워줄 선생도 초청하여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학계’ 또는 ‘서당계’라고 불렀다.
④ 마을의 공동이익을 위한 계로서는 ‘동계’, ‘이중계’, ‘부락계’ 등이 있었다.
⑤ 문중과 관련한 계로서는 ‘문중계’(‘종중계’), ‘대문계’, ‘세찬계’ 등이 대표적이었다.
⑦ 상호교제와 친목을 위한 계로서는 ‘향도계’, ‘향약계’, ‘동갑계’ 등이 있었다.

계의 종류와 명칭은 다종다양하였으며 그 성원수도 각이하였다. 작은 규모의 계는 평균 4~5명이었으며 많은 것은 수십명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계는 그 운영을 위하여 일정한 재산을 가지고있었다. 그 재산은 일반적으로 계원들에게서 모은 얼마간의 돈 혹은 곡물로 이루어졌다. 계성원들이 내는 돈과 곡물의 양은 균등한 것이 보통이었으나 계의 특성에 따라서 차이있게 내는 경우도 있었다. 계성원들의 출자는 계에 가입할 때 한번에 내는 경우도 있고 또 정기적으로(1년에 한번~두번) 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수시로 금전 또는 곡물, 노력을 내여 긴급히 제기되는 문제들을 공동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계재산은 계성원들의 공동소유로서 그 이용권도 평등하였으며 그 이용은 계성원들에 한하여 윤번으로 진행되었다.

계의 재산은 역원들이 관리하였다. 계재산의 이용은 전체 계성원들의 통제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재산관리에 대한 총화는 계원총회에서 하였다. 총회는 대체로 1년에 한번 정도 진행하였는데 가을걷이가 끝난후부터 다음해 파종이 시작되기전에 하였다. 총회날에 계성원들은 모두가 계장이나 유사의 집에 모여서 1년간의 계조직이 활동한 정형을 총화하고 역원들을 새로 선출하며 주연을 베풀어 하루를 즐기었다. 계장이나 유사의 임기는 대체로 1년간이었으나 계속 력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원으로서는 계장 1명, 유사 2명(재무담당 또는 총무) 등으로 구성되었다. 계장은 계조직의 총책임자였으며 계의 조직목적에 따라 계조직을 운영하였다. 유사는 대체로 계자금의 지출, 수납 등 재산을 주관하였다. 계조직에는 일정한 규약이 있었는데 계성원들은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켰으며 만약 그것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계에서 쫓겨나거나 일정한 제재를 받았다.

이처럼 계의 종류와 명칭 그리고 계의 재산축적과 그 이용방법은 다양하였으며 계약기간도 서로 달랐다. 계는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상호부조조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계풍습이 널리 보급되게 된 것은 그것이 사회의 조건에서 주민들의 생활상 편의를 일정하게나마 보장하는 부조조직이었기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계풍습이 어렵고 힘든 일들을 서로 도와 풀어나가는 미풍이었다는 사정과 관련되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향도’와 ‘계’를 뭇고 상호부조하는 풍습은 오랫동안 각이한 계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면서 전해진 우수한 미풍양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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