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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관 > 노동생활풍습 > 꿀벌치기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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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치기의 역사개요
북한지역정보넷 양봉업풍습의 역사개관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꿀벌을 많이 쳐왔다. 우리나라에서 양봉업풍습은 대체로 가축기르기풍습과 거의 같은 시기 즉 신석기시대 후기에 발생한 것으로 인정된다.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우리 민족은 원시시대 사냥을 하면서 산꿀을 채취하여 먹다가 가축기르기와 함께 양봉업도 시작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고대에 와서 이미 하고 있던 양봉업이 더욱 보급되었다고 인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약용이나 식용으로 꿀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양봉업을 많이 하였다. 통일신라에서 683년 2월 신문왕이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으면서 보낸 예장 가운데는 꿀도 들어있었다. 통일신라 왕궁에 꿀을 많이 저장하고 있은 사실은 삼국시대에도 양봉업을 통하여 적지 않은 꿀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발해에서도 양봉업풍습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발해는 739년 7월 사신을 통하여 일본에 꿀 3되를, 872년 5월에는 5섬을 보내었다. 이 사실은 산지대가 많은 발해에서 양봉업이 매우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양봉업풍습은 보다 일반화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양봉업 방법과 기술에서는 전 시기와 큰 변화가 없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양봉업은 보다 많이 넓은 지역에서 진행하고 벌통관리를 더욱 합리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꿀생산량이 훨씬 늘어났다. 1041년 1월 삼사의 제의에 따라 지방관들이 관할 주, 군에서 해마다 국가에 바치기로 한 세공 가운데에 꿀도 한섬 포함되어 있었다. 해마다 매개 주, 군, 현에서 한섬씩이나 되는 꿀을 바치게 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양으로서 그만큼 양봉업이 보편화되어 상당한 양의 꿀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고려사』 ‘형지’에 의하면 12세기 말에 통치자들 속에서 부화사치한 풍조가 만연되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연회를 승벽내기로 잘 차리는 일이 벌어졌으며 “낟알을 진흙처럼 보고 유밀과를 만들면서 꿀을 뜨물처럼 낭비”하는 현상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1192년에 법적으로 일반 연회에서 유밀과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이후에도 1282년과 1310년에 두 번이나 유밀과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유밀과는 고려시대 찹쌀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기름에 구워낸 일종의 과자였다. 고려시대 유밀과를 만드는데 꿀을 널리 썼고 그것을 위하여 꿀을 물쓰듯 하여 국가가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꿀이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조선시대에도 양봉업 방법과 기술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보다 넓은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꿀벌을 쳤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원도는 26개 군, 현에서 모두 꿀이 생산되었고 함경도에서는 22개 군, 현 가운데서 13개 고장에서 꿀이 생산되었다. 위의 숫자만 보더라도 15세기 후반기에 평야지방을 내놓고 웬만한 산간지방에서는 모두 꿀벌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양봉업은 그 전 시기에 비하여 보다 보편화되고 더욱 성행하였다. 그것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의 ‘공상조’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이 편찬된 19세기 초의 규정에 의하면 국왕과 왕비에게 매일 각각 청밀 10말 6되 2홉을, 매달 황밀(개꿀)을 국왕에게는 288근, 왕비에게는 120근을, 생일이나 명절날에는 청밀 1말 8되씩을 각각 공급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국왕과 왕비에게 많은 양의 꿀을 공급하도록 규정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시기 꿀이 대량적으로 생산되었고 조선이 공물이나 진상품으로 꿀을 백성들로부터 수탈해 들인 양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19세기초 서울에는 국가로부터 독점판매권을 받은 청밀점방까지 있었다. 판매권을 독점한 전문적인 큰 청밀상점이 수도에 설치된 것은 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사정과도 관련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구매자들의 요구에 따라 항시적으로 판매할 만큼 많은 양의 꿀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대량 생산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근대에 들어와 개량종 양봉업이 새로 보급되고 식용 및 약용 원재료로서 꿀의 상품화가 확대되면서 양봉업풍습은 더욱 널리 보급되고 성행하였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깊은 산을 끼고 있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대도시를 가까이 두고 있는 경기도에서 양봉업을 많이 하였다.

이렇듯 양봉업은 일찍부터 우리 민족 속에서 주요한 생산노동의 한 분야로서 널리 보급되어 왔으며 선조들은 장구한 기간 양봉업을 해오는 과정에 고유한 양봉업풍습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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