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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미역, 다시마 따기
미역을 비롯한 바다나물의 실용적 가치를 제일 먼저 파악하고 그것을 뜯어 이용한 것은 우리민족이었다. 『해동역사』에는 “다시마는 지금 오직 고려에서만 생산된다”고 하였으며 『유서찬요』에 “석발(石髮)은 신라의 것을 상등으로 치는데 그 나라에서는 금모채(金毛菜)라고 한다”고 썼고 『본초습유』에는 “대엽조(大葉藻)는 신라국의 깊은 바다에서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역사기록들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바다나물의 명산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였고 바다나물을 채취하여 제일 먼저 식용과 약재로 이용한 것도 우리 민족이었다.

바다나물 가운데서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뜯어먹은 것은 미역, 다시마였다. 우리 선조들은 미역따기를 배를 타고 하기도 하고 배가 없이 바닷가에서 하기도 하였으며 자맥질로 물속에 들어가 뜯어내오기도 하였다. 미역따기에서 가장많이 해온 방법은 마상이 위에 앉아 바닷가나 섬주변에서 미역따기도구들을 이용하여 베어 내거나 감아뜯어내는 것이었다. 미역따기에 쓴 배는 바닷물고기잡이때에 쓰는 사돌배였다.

미역, 다시마 따기를 할 때에는 그에 필요한 도구를 싣고나가 채취활동을 벌였다. 미역따기도구 가운데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많이 쓰인 것은 미역낫이었다. 미역낫은 날길이 7치~1자, 날너비 1치 정도 되는 것을 2발 정도 이상의 노간주, 잎갈나무나 왕대 자루에 맞추어 만들었다. 자루는 물 깊이에 따라 계속 연결할 수 있게 연결쇠를 만들고 한 낫에 3~4개의 자루를 준비해 두었다. 자룻감은 될수록 물속에서 쉽게 휘거나 썩지 않으며 재질이 단단하고 무거운 나무줄기들을 썼다. 낫형태는 논밭에서 쓰는 낫과 별반 차이가 없이 만들었다. 미역도 바다밑에서 자라는 식물이었으므로 농사에 쓰이던 낫이 그대로 바다의 미역낫으로 쓰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써오던 미역낫은 우리나라 동, 서, 남해의 것이 거의 다 같았다.

미역따기도구에서 또한 많이 쓰인 것은 동틀개였다. 동틀개는 일정하게 굵은 참나무나 대나무 토막에 살과 갈퀴를 듬성듬성 박고 그 통나무토막에 가는 참나무, 노간주나무, 잎갈나무 혹은 왕대로 자루를 박아 만들었다. 동틀개라는 말은 통(筒)을 둥글둥글 굴리면서 트는 도구라는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동틀개의 기본 형태와 구조, 작용원리는 동, 서, 남해에서 대체로 같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경과하는 과정에 지역에 따라 만드는데서 약간의 차이가 생겨났다. 동해안에서는 둥근 참나무토막에 쇠꼬치나 박달나무, 참나무로 살을 박고 자루를 맞추었는데 거기에 물푸레나뭇대를 꼬아 만든 연결부를 하나 더 만들어 붙였다. 이 연결부를 목이라고 불렀다. 연결부 - 목을 다시 박달나무 자루와 연결시켰다. 통이라고 하는 머리부분은 물속에서도 쉽게 뻐개지거나 변형이 가지 않는 2~3자 정도의 참나무나 자작나무, 박달나무로 만들었고 여기에 8~10개 정도의 살을 박아놓았다.

물푸레나무를 꼬아 만든 목은 동틀개의 탄력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머리통을 바다밑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여도 자루가 휘거나 구부러질 뿐 부러질 우려가 없고 배를 자주 이동시키지 않아도 자루의 경사각도를 보장해 주어 미역을 불편없이 딸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자루를 돌릴 때에도 힘을 적게 들이면서도 잘 돌릴수 있고 살이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미역을 상함이 없이 감아 뜯어낼 수 있는 작용을 하였다. 목과 연결된 자루의 길이는 보통 두세발 정도였으며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다른 자루를 연결하여 더 늘이기도 하였다.

동해의 동틀개의 자루가 이처럼 길게 되어 있는 것은 동해바닷가 서해나 남해에 비하여 더 깊고 동해의 미역들이 수심이 깊은 곳에서 많이 자라고 있던 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동틀개는 자루가 한두발 정도로 짧았으며 자룻대의 맨 뒤 끝에 왜손이라는 손잡이가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루에 힘을 덜 주고도 쉽게 틀수 있었다. 이런 특징은 서해바다의 수심이 비교적 얕고 바다밑 지형이 그닥 복잡하지 않은 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남해안의 동틀개는 머리부가 따로 없이 살과 갈퀴들을 직접 자룻대에 붙여 만든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것은 동틀개의 재료로 왕대를 쓰는 것과 많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해에서는 가지가 비교적 많은 왕대나무를 골라 그 가지들을 다듬어 살로 하였으며 살가지들의 사이사이마다에는 돌을 고정시켜 동틀개를 만들었다. 이것은 왕대가 가볍고 속이 비어 있으므로 물속에 넣을 때 부력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렇게 만든 동틀개에 다시 왜손잡이가 달린 왕대나무 자루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이 동틀개는 왕대나무가 흔하고 바닥지형이 험하지 않은 남해의 실정에 알맞은 것이었다. 이렇듯 동틀개 하나를 만들어도 우리 민족은 자기 지방의 특성에 맞으며 생산적 효과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미역따기도구로 또한 살틀개라는 것을 만들어 써왔다. 살틀개는 도리깨살 같은 나무살이나 쇠꼬챙이살을 자룻대에 수평으로 고정시켜 왜손잡이로 자루를 들릴 때 미역들이 살에 감기게 만들었다. 살을 가지고 만든 틀개였기 때문에 살틀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살은 물푸레나무나 자작나무, 노간주나무 가지로 만들었는데 하나의 살틀개에 보통 3~5개씩 박아놓았다. 틀개살이 두 개짜리도 있었는데 이것은 맞틀개라고도 불렀다.

후세에 내려오면서 왜손은 일부 변형되어 ‘T’형 가로손잡이로 되어 버린 것들도 있다. 일부 살틀개는 살을 앞으로 곧바로 박지 않고 뒤로 넘어지거나 안으로 꺾어지게 만들어 붙여 갈퀴나 곽쟁이처럼 미역을 감아 긁어당기게 만든 것도 있었다. 이것을 일명 끌개살이라고 불렀다. 이 살틀개들은 우리 선조들이 도리깨나 작시미, 곽쟁이 등을 수산물 채취활동에 적용하여 창안제작한 창조물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미역따기도구로 곽쟁이와 갈퀴도 만들어 썼다. 곽쟁이는 말그대로 나무꾼들이 쓰는 곽쟁이처럼 만들었다. 다만 살이 더 길고 든든했으며 자루가 훨씬 길었다. 자루의 길이는 한발남짓 하였다.

곽쟁이에는 나무자루끝에서부터 철사를 뒤로 돌려 자루와 15~20° 각이 되게 구부려 만든 것도 있었다. 이것은 여느 곽쟁이로 당겨서 잘 뜯어지지 않는 미역이나 다시마 줄기들과 곽쟁이로 긁어올릴수 없는 큰 덩어리의 미역을 긁어올리기에 편리하였다. 곽쟁이는 후세에 내려오면서 점차 대형화되었다. 곽쟁이살들이 쇠줄이나 철사로 만들어지지 않고 쇠꼬챙이들로 만들어지고 엄청나게 커졌다. 또한 사람이 혼자서 다룰 때 쓰기 편리했던 나무자루가 없어지고 대신 밧줄이 생겨났다. 이렇게 큰 곽쟁이는 배로 끌었다. 대형화된 곽쟁이는 재래식도구를 밀어내지 못하였다. 작은 배를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미역을 따는 재래식 곽쟁이는 의연 사람들의 몸에 맞고 손에 익은 도구로서 생활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역따기도구의 일종인 갈퀴는 쇠스랑과 비슷하였는데 미역을 긁어당겨 따내는데 썼다. 갈퀴는 갈퀴살들을 자루의 아래안쪽 한방향으로 구부러지게 만들기도 하고 뒤로 약간 누으면서 사방으로 뻗게 만들기도 하였다. 일정한 방향으로 구부러지게 만든 갈퀴는 쇠스랑형태였으며 살이 난초잎마냥 사방으로 뻗게 만든 갈퀴는 무기의 형태였다. 전자는 바다밑바닥이 평평한데서 긁어 당기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고 후자는 기복이 복잡한 곳에서 트는 것과 당기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미역따기도구에는 미역을 베거나 따내는 도구들과 함께 따낸 미역을 담아내는 도구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미역담기그릇으로 미역망태를 들수 있다. 미역망태는 윗부분에는 물푸레나무 가지나 철사로 원형테두리를 만들고 아랫부분에는 그물로 그릇모양을 만들어 매단 광주리였다. 윗부분의 원형테두리 가녘에는 노끈을 꼬아 손잡이를 만들어 붙였다. 망태의 직경은 한자 남짓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미역따기도구들은 그 하나하나가 다 오랜 세월의 수산노동과정에 부단히 개조 완성되어 온 것으로서 바다를 정복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 지혜와 노동의 산물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미역따기도구들을 능숙하게 이용하여 동, 서, 남해의 바다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미역, 다시마를 많이 따냈다. 미역은 대체로 난류가 흐르는 날바다와 그에 가까운 곳의 바위나 돌위에 붙어사는 바다나물로서 간조선이하 5~10m안의 깊고 낮은 곳에서 잘 자랐다. 북쪽바다일수록 얕은 곳에서 잘 자랐고 남쪽 바다일수록 깊은 곳에서 잘 자랐다. 그리고 모래바닥보다 바위나 자갈이 깔린 곳에서 더 잘 자랐다.
우리 민족은 장구한 기간에 축적된 체험과 지식을 통하여 미역의 이러한 서식상 특성을 잘 알고 물밑을 내려다보면서 낫, 틀개, 곽쟁이로 미역을 따냈다. 미역따는 시기는 물에 들어서서 일할 수 있는 기간 즉 봄부터 초가을까지 6~7개월 기간으로 정하였다.

남해바닷가에서는 시작과 마감이 동, 서해의 북쪽바다들에서보다 좀 더 길었다. 미역따기는 마을마다 일정한 약속과 계율에 따라 시작하였으며 제마음대로 하고 싶은 때에 아무 장소에서나 하지 못하였다. 마을의 좌상들은 바닷가의 미역터들을 돌아보고 미역의 자라난 정도와 날씨, 바다흐름을 고려하여 통문을 돌리거나 서로 모여 의논을 한 다음 영을 내려 미역따기를 시작하게 하였다. 만약 이 질서를 어기고 몰래 혼자서 물에 들어서거나 제멋대로 미역따기를 하면 마을사람들의 비난과 규탄을 받았다. 일단 미역따기 영만 떨어지면 온 마을이 떨쳐나 미역따기로 흥성거렸다.

미역따기는 대체로 세가지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그 하나는 배에서 미역낫으로 미역, 다시마를 베어낸 다음 그것을 배위로 끌어올리는 방법이었는데 이것을 낫대각 혹은 낫질이라고 하였다. 낫대각질을 할 때에는 혼자서 마상이 위에서 창경으로 미역을 들여다 보면서 장대끝에 맨 낫으로 미역을 한포기씩 베어 올렸다. 이 때 낫질꾼은 배가 파도에 밀리지 않도록 노를 저으면서 잘 조절하여야 하였으며 특히 작업할 때 물을 흐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낫대각질은 흔히 혼자서 하였지만 3명씩 짝을 맺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3명조가 미역따기를 할 때에는 1명은 낫을 잡고 미역베기를 전문으로 하고 다른 한명은 거릿대를 잡고 건지기만 하였으며 또 다른 한명은 노를 잡고 배젓기만 하였다. 한배에 탄 이 3명은 서로서로 손발을 맞추어 하나의 움직임이나 눈짓을 보고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리면서 미역따기를 하였다. 노력평가를 하면 낫대질을 하는 사람이 제일 수고가 컸으나 분배에서는 서로 차별없이 좌상의 주견에 따라 화목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협동작업은 혼자서 하는 미역따기보다 훨씬 능률적이었으나 그에 따르는 큰 배가 요구되었다. 다른 하나는 배위에서 끌개를 잡아당기면서 미역을 긁어내는 방법으로 하였는데 이것을 끌개각질이라고 하였다. 끌개각질을 할 때에는 동틀개, 왕틀개, 살틀개, 곽쟁이, 거릿대들을 가지고 얕은 곳에서 바닥을 들여다보면서 미역을 휘감아 올렸다.

왕틀개는 큰 동틀개를 보고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으로 미역을 딸 때에는 미역이 무성하게 자란 밭에서 3명으로 조를 맺어 일하였다. 두사람은 왕틀개를 다루며 미역을 뜯어 건져냈으며 한명은 전문적으로 배 조절만 하였다. 끌개각질에서 특징적인 것은 대형곽쟁이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었다. 대형끌곽쟁이를 배에 싣고나가 미역이 많은 곳을 찾게 되면 닻을 내린 다음 끌곽쟁이를 조절하여 미역밭에 박았다. 그 다음 배뒷전에서 두사람이 끌곽쟁이줄을 잡아당기면서 미역을 끌어냈다. 그때 다른 한사람은 노를 잡고 배를 조절하든가 아니면 배 앞섭에서 닻줄을 쥐고 배를 앞으로 몰면서 끌개살을 잡아당기는데 힘을 합치기도 하였다. 이 대형끌곽쟁이질은 미역이 무성한 곳에서 한번에 많은 수확을 얻는 우월한 점이 있었으나 바닥지형조건에 많은 제약을 받는 단점도 있었다.

미역 따기에는 또한 자맥질을 하여 따내는 방법도 있었다. 동, 서, 남해에서 조상전래로 이 방법을 많이 써왔지만 특히 남해에서 더 많이 적용하였다. 잠수질에서 대표적인 것이 제주도에서의 미역따기방식이었다. 제주도의 미역따기란 다 자란 미역을 일정한 기간 따내지 않고 더 키웠다가 걷어들일 시기(3월 중순경)가 되었을 때 날을 받아 가지고 시작통문을 돌린 다음 일제히 미역따기를 진행하는 풍습을 말한다. 제주도 해안부락에 살고 있는 부녀자들은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자란 탓으로 거의 모두가 잠수능수들이었다. 이들은 보통 10m 깊이까지 잠수하여 2분 이상씩 견디곤 하였다.

미역따기날이 되면 해녀생활에서 은퇴하였던 나이많은 여성들도 미역을 따기 위하여 바다에 나왔으며 가족들과 이웃들까지 해녀들의 잠수작업을 돕고 따들인 미역을 운반하려고 바다에 나오기 때문에 바닷가는 말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간편하게 몸을 가리고 미역망태와 짧은 미역낫을 든 해녀들이 입수신호가 떨어지기 바쁘게 일제히 바다에 뛰어드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들은 미역밭까지 헤엄쳐 나가 서로 휘파람으로 신호하면서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하며 미역을 따내었다. 따낸 미역은 산더미를 이루었는데 가족별로 묶어 집집마다 날라들였다. 이렇듯 여러 가지 미역따기도구들을 이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미역과 다시마를 따들이는 관습은 역대로 전승되면서 더욱 공고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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