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시는 북부는 신원군, 동부는 청단군, 서부는 벽성군과 잇닿아 있으며 남부는 서해에 닿아 있다.
서북~동남(신광리~장방리) 간의 길이는 24km이고, 북동~남서(학현동~석천동) 간의 길이는 11km이며,
면적은 206.93㎢로서 도 전체면적의 2.45%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서 섬의 면적은 0.03㎢이고, 시의 해안선길이는 41.1km이다. 고구려시기에 내미홀(內米忽)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이 다시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태조가 이 고을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면해 있다 하여 해주라 명명하였다고 하였다. 해주시에서는 적어도 신석기시대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해주시의 용당포(龍塘浦)조개더미와 원시집터에서 신석기시대의 노동도구와 질그릇들이 발굴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있다.
해주시 부용동의 해주제1중학교
그 후 한때 마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서서 고구려의 판도로 되어 내미홀군(內米忽郡) 혹은 지성(池城),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의 땅이 되어 757년경에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왕조가 들어서면서 10세기 전반기부터 해주로 불렸다. 이후 조선 초기까지 해주목으로 있으면서
황해도의 행정소재지로서의 구실을 하였고 1449년(세종 31년)에 병영이 설치되고 관찰사영(觀察使營)이
황주(黃州)로 옮겨지는 바람에 한동안 소외되었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관찰사영이 해주로 옮겨오면서 다시 황해도의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해주시 전경
광복 직후에는 해주부를 해주시로 개편하기도 하였고 1954년에 황해도가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리될 때 황해남도 해주시로 되면서 황해남도의 소재지로 되었다.
해주시의 한 농가
2003년 기준 행정구역은 26동(결성동, 광석동, 광하동, 구제동, 남산동, 대곡동, 용당동, 부용동, 사미동, 산성동, 새거리동, 서애동, 석미동, 석천동, 선산동, 승마동, 양사동, 양지동, 연하동, 영광동, 옥계동, 읍파동, 장춘동, 학현동, 해운동, 해청동), 5리(신광리, 연양리, 영양리, 작천리, 장방리)로 구성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