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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정보넷 머리꾸밈새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옷차림과 몸단장을 하는 데서 머리꾸밈새 하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머리꾸밈새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몸단장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머리단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먼저 끄는 부분의 하나이고 머리단장을 통하여 사람들의 정신상태와 문화수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단장은 특히 여자들의 미를 돋우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졌으므로 남자들보다 몸단장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여자들은 차림새에서 머리단장을 매우 중시하였다. 남자들은 의례적인 차림을 하는 데서 관모를 필수적인 것으로 중시하였다면 여자들은 머리단장에 더 깊이 주의를 하였다.

여자들의 머리꾸밈새도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변화 발전되어 왔다. 여자들은 처음에 앞머리칼을 이마 양쪽으로 갈라 넘기거나 긴 머리칼을 간편하게 자르는 등 단순한 형식으로 머리를 꾸몄다. 그후 사람들의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옷차림새가 달라지면서 여자들은 거기에 어울리게 여러 가지 형식의 머리꾸밈새를 하게 되었다.

고구려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계층 여자들의 머리꾸밈새는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하며 방법도 발전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자들의 머리꾸밈새는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우리나라 여자들의 머리꾸밈 형태는 계급 신분이나 나이 등에 따라서 각기 달랐으나 크게 올린머리와 내린머리 형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여자들의 머리꾸밈 형식은 매우 다양하나 어떤 형식이거나를 막론하고 다 올리거나 내린 상태의 머리를 여러 가지 형식으로 꾸몄던 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서 올린머리는 시집간 여자들이 꾸미는 전통적인 머리형식이었고 내린머리는 시집가기 전의 여자들 즉 처녀들이 꾸미는 머리형식이었다. 올린머리 형식에서 대표적인 것은 얹은머리와 쪽진머리였으며 이밖에 큰머리, 어여머리, 첩지머리, 조짐머리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역사가 오래며 일반화되었던 머리형식은 얹은머리와 쪽진머리였다. 얹은머리는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틀어 올린 형식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여자들이 가장 많이 즐겨 꾸며 온 머리형식의 하나였다.

기록이나 벽화 자료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여자들이 얹은머리를 많이 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북사(北史)』에서는 백제에서 “여인들이 머리를 땋아서 뒤에 드리운다. 출가하면 두 가닥으로 나누어 머리 위에 튼다”고 하였으며, 고구려의 안악3호무덤 벽화와 덕흥리고분벽화, 춤무덤 벽화들에서도 얹은머리를 한 여자들의 모습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벽화 자료에 의하면 얹은머리 형식에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서 올린 것도 있고 고리 모양으로 틀어 올린 것도 있는데 대체로 일반 부녀자들은 하나로 묶어 틀어 올리었고 귀족 부인들은 고리 모양으로 틀어 올렸다.

고리 모양을 한 귀부인들의 머리형식은 삼국시대에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머리꾸밈새였으나 하나로 묶어 올린 얹은머리 형식은 그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그대로 계승되어 일반 부녀자들과 귀족 부인들 속에서 일반화되었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성호새설류선』에는 당시 부녀자들이 머리카락을 모두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를 둘러 앞이마 위에 쪽지고 그 끝을 오른쪽에 꽂아서 끈(댕기)으로 드리웠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온 얹은머리는 머리카락을 머리 뒤쪽에 모아서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 약간 비틀거나 또는 땋은 다음 그것을 앞이마에까지 둘러다가 이마 위에 쪽을 지었으며 남은 머리카락 끝에는 붉은색이나 자주색 댕기를 드려서 오른쪽에 꽂은 것이었다.

머리숱이 많은 여자들은 얹은머리를 할 때 자기 머리칼만으로 꾸몄으나 머리숱이 적은 여자들은 다리를 드려 꾸미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다리머리는 조선 후반기에 양반 부녀자들 속에서 성행하였다. 다리를 덧드려서 얹은머리를 하는 풍습은 그림 자료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유운흥의 그림 ‘여인들의 머리단장’은 당시에 유행되었던 다리머리를 잘 보여 준다. 이 그림에는 긴 다리(달비)를 땋고 있는 여자와 함께 이미 땋은 머리를 머리 위에 틀어 올린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얹은머리의 주인공들은 모두 부유한 양반계층의 부녀자들이거나 기녀들인데 그들은 다리가 큰 것을 미(美)로, 자랑으로 여겼다.

다리를 덧드려 머리를 얹는 풍습은 여자들 속에서 커다란 폐단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집들에서는 비싼 다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재산까지 팔지 않으며 안되었으며 다리를 마련하지 못해 딸의 혼사 시기를 놓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하여 1791년에 국가적으로 다리머리를 하는 풍습을 금지하고 그 대신 족두리나 화관을 사용하여 머리치장을 하도록 한 일도 있었다. 그후에도 여러 차례의 금지 조치가 취해졌으나 다리를 대신한 족두리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으므로 다리머리 얹는 풍습을 좀처럼 없애지 못하였다.

19세기 초의 실학자 이규경(1788~?)은 13살난 한 부잣집 여자가 높고 무거운 다리를 얹었는데 시아버지가 방안에 들어오니 서려고 하다가 다리의 압력으로 “목이 부러져 죽은 사실”을 개탄하면서 “사치가 능히 살인할 수 있으니 비통하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기는 하나 다리머리를 하는 폐단이 얼마나 극심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다리머리는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금지령과 사회적 비난으로 인하여 그리고 시대적 미감에도 잘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한편 다리를 드리지 않고 자기 머리만으로 꾸미는 얹은머리는 일반 백성들의 일상적인 머리단장 형식으로서 조선 말기까지 전국적으로 전해 왔다. 그러나 이것도 20세기 초에 보다 간편한 쪽진머리가 더 광범히 보급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쪽진머리도 우리나라 여자들의 머리꾸밈에서 기본 형식의 하나였다. 얹은머리가 머리칼을 앞이마 위에 모아 쪽진 것이라면 쪽진머리는 머리칼을 뒷머리에 가져다 모아 쪽진 것이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춤무덤 벽화를 비롯한 벽화들에 여자들이 쪽진머리와 유사한 머리꾸밈새를 한 것이 보이며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시대 여자들의 머리꾸밈 형식에 대하여 “부인들이 머리를 튼 것은 귀천이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부인들이 머리를 튼 것”이란 곧 쪽진머리를 말한다. 이것은 고려시대에도 부녀자들이 쪽진머리를 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 형식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말엽에 이르러 쪽진머리는 다리머리가 없어지면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조선 중엽 정조 신해년(정조 15년, 1791년) 이전까지는 큰 다리가 있어 이것을 가발이라 하였으며 제머리와 합쳐 땋지 않고 긴 다리를 땋아 머리를 한 번 두를 만큼 만들어 얹고 비녀를 꽂았다. 정조 15년 이후 가발을 금하고 북계(뒤에 튼 상투)를 썼는데 풍속에 이르기를 낭자(娘子)라고 하였다. 낭자는 머리를 땋아 머리 뒤에 둥글게 서린 다음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쓰게 한 것이다.

순조 중엽 이후로 전국의 부녀가 ‘다리’로 머리얹는 법을 없애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머리 뒤에 ‘쪽’을 지은 다음 작은 비녀를 꽂았는데 이것이 이대로 풍속으로 되었다.” 이 자료는 18세기 말엽부터 쪽진머리가 부인들 속에 적지 않게 보급되어 그것이 19세기 중엽 이후에 여자머리 형식에서 기본을 이루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쪽진머리는 자기의 머리칼만을 가지고 머리단장을 함으로써 얹은머리에 비하여 간편하고도 단정한 머리형식이었다. 쪽진머리는 쪽의 위치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머리 뒤덜미에 낮게 쪽지는 것을 낮은낭자라고 하였고 뒷덜미 바로 위에 쪽지는 것을 뙈야머리라고 하였다.
쪽진머리에서 쪽의 위치는 처음에는 뒷머리에 고정되었던것이 점차 아래로 내려와 조선 말기에는 저고리 고대 밑에 있게 되었으며 근대에 와서는 다시 머리 뒤로 올라가 오늘날의 고유한 머리형식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쪽진머리는 원래 양반집 부녀자들만 하였는데 19세기 초에 와서는 뙈야머리와 낮은낭자머리의 중간형으로 변화되면서 점차 널리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부 여자들이 이러한 머리꾸밈을 하게 되었다. 쪽진 머리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얼굴형에도 맞으며 민족옷차림새에도 잘 어울리는 세련되고 점잖은 머리형식이었다. 우아하고 보기 좋은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어울리게 머리를 곱게 빗어넘겨 쪽진 다음 비녀를 꽂은 얌전하고 세련된 모습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부드러우면서도 곧고 강인하며 고상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여자들의 올린머리 형식에는 또한 큰머리와 어여머리, 첩지머리, 조짐머리도 있었다. 큰머리는 어여머리 위에 ‘떠구지’라는 나무로 만든 ‘머리’를 얹어 놓은 것으로서 ‘떠구지머리’라고도 하였다. 큰머리는 18세기말에 다리머리 금지령이 내리자 궁녀들 속에서 다리 대신 ‘떠구지’를 올려 놓고 단장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났다.

어여머리는 속에 솜을 넣고 겉은 검은 비단으로 얇게 싼 받침을 머리에 얹고 다리로 여러 벌 감아 고정시킨 커다란 머리형식이었다. 어여머리는 옥판과 화잠(꽃비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큰머리와 어여머리는 기록에 ‘거두미(巨頭味)’, ‘어여미’, ‘어유미(於由味)’라는 이름으로도 표기되었다. 『정조실록』에는 “어유미와 거두미는 빈(왕의 첩), 세자빈, 공주, 옹주, 종친 부인들, 문무관의 처들이 일상적으로 하거나 민간의 혼례에도 하는 것이므로 금지해서는 안된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큰머리와 어여머리가 비록 다르게 표기되고 있으나 그 용도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어유미와 거두미는 주로 왕족들과 문무관료들의 부인들, 궁녀들이 예장용으로 그리고 민간에서 혼례 때 새색시의 머리단장으로도 쓰인 머리형식이었다. 큰머리나 어여머리는 근대 문명의 보급과 함께 점차 없어지고 말았다.

첩지머리는 여자들의 머리단장에 ‘첩지(貼?)’라는 물건을 사용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첩지는 족두리나 화관 같은 것을 쓸 때에 그것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비녀처럼 길게 생긴 것인데 좌우에 긴 머리칼을 달았다. 첩지에는 도금한 금속제의 봉황첩지와 도금한 금속이나 은, 검은 뼈로 만든 개구리 모양의 첩지 등이 있었다. 첩지머리는 첩지를 가르마 가운데를 중심으로 하여 세로로 고정시키고 첩지에 단 머리칼을 양쪽으로 느슷느슷하게 땋아 뒤에서 머리와 한데 묶어 쪽을 진 머리형식이었다. 첩지머리는 상류계층의 여자들이라 하더라도 예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하지 않았으나 궁중에서만은 평상시에도 첩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결국 첩지머리는 궁중에 종사하는 여자들이 주로 하는 머리꾸밈새가 되었고 따라서 궁중의식이 진행되던 조선 말기까지 존재하였다.

머리단장에 이용된 물건에는 첩지 이외에 ‘가리마(加里?)’라는 것도 있었다. 가리마는 부녀자들이 예장을 할 때에 큰머리 위에 덮는 검은 천을 말한다. 가리마는 궁중에서 주로 바느질하는 부인들과 의술을 맡아보는 여자들이 사용하였다. 조짐머리는 다리머리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데 다리로 낭자를 소라딱지 비슷하게 크게 틀어 만들어서 쪽진머리에 덧드린 머리형식이었다. 이 머리형식은 얹은머리 대신에 쪽진머리를 하게 된 이후부터 쪽진머리의 쪽을 크게 함으로써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짐머리도 궁중에서 여자들이 하는 머리꾸밈새의 하나였다.

여자들의 올린머리 형식에는 얹은머리의 변형으로서 머리 위에 두 개의 꼭지가 솟게 한 머리형식도 있었다. 다시 말하여 이것은 머리카락을 전부 머리 위로 올려 가르마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개의 꼭지를 틀어 만든 머리형식이었다. 머리 위에 두 개의 꼭지가 솟게 한 머리형식도 역시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여자들이 계승하여 온 고유한 머리형식이었다. 고구려의 춤무덤 벽화에서 춤추는 여자들의 행렬도 앞에 선 여자의 머리장식에서 이러한 머리형식을 여러 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리 위에 두 개의 꼭지를 틀어 단장한 머리형식은 그 이후 시기에는 크게 유행되지 않았다.

여자의 올린머리에는 이밖에도 새앙낭자머리, 종종머리 등 특수한 형태의 것도 있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여자들의 내린머리 형식에는 대표적으로 단발머리와 땋은머리가 있었다. 단발머리나 땋은머리는 처녀들의 머리형식에서 기본을 이루었다. 단발머리는 덕흥리고분벽화나 안악2호무덤 벽화를 비롯한 여러 고구려고분벽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단발머리는 산뜻하고 간편한 것이었으나 유교도덕의 견지에서 괴상망측한 것으로 간주되어 오래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미감에 부합되어 다시 계승되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처녀들이 땋은머리도 하였는데 그것은 『북사』에 백제의 처녀들이 외줄로 머리채를 땋아 뒤에 늘였다고 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결혼 전의 여자들은 땋은머리를 하였다. 『고려도경』에 고려에서 결혼하기 전의 여자들이 머리를 묶어 뒤에 드리우고 댕기를 늘이었는데 흔히 빨간 댕기를 맸다고 한 것은 당시 처녀들의 땋은머리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땋은머리는 처녀들의 가장 일반적인 머리형식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땋은머리를 한 것은 처녀이고 쪽진머리를 한 것은 시집을 간 여자라는 것을 쉽게 가려 볼 수 있게 되었다.

땋은머리에는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었다. 그 하나는 앞머리 가운데에 가림을 내여 양쪽으로 내여 드리운 머리를 뒤로 모아 외태로 땋은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양쪽 귀밑머리를 작게 땋아 그것을 뒤로 가져다가 큰 머리태에 합쳐 다시 하나로 땋아 늘이고 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운 것이었다. 한 가닥으로 땋아 늘인 것을 ‘외태머리’라고 하였고 귀밑머리까지 땋은 것을 ‘귀밑머리’라고도 하였다.

머리꾸밈새는 총각의 경우도 처녀의 것과 같았다. 처녀 총각들은 귀밑머리를 혼례 때에야 완전히 풀어버릴 수 있었다. 이로부터 처녀 총각이 결혼한 것을 가리켜 ‘귀밑머리 마주 푼 양주’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처녀들이 머리채가 길고 실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삼단 같은 머리채’라 하여 실한 머리채를 매우 부러워하였다. 이로부터 머리채가 약한 처녀들은 다리를 자기 머리에 보태어 머리채를 실하게 만들어 땋아 드리기도 하였다. 처녀들은 다리를 귀하게 여겼는데 그것은 혼인 예장에 좋은 다리를 몇 개 보냈는가에 따라 예장품의 가치가 좌우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처녀들의 머리꾸밈새에는 이밖에도 단발머리나 땋은머리의 변형으로서 묶은중발머리, 새앙머리, 바둑판머리 등도 있었다.

묶은중발머리는 머리카락이 채 자라기 전에 짧은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것으로서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지 않은 처녀애들의 머리형식이었다. 묶은중발머리는 고구려의 장천1호무덤 벽화의 노래 부르는 여자의 머리형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 이후 시기에도 계승된 전통적인 머리형식이었다.

새앙머리는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갈라서 땋고 그것을 다시 틀어 올려 아래위로 두 덩어리가 지게 잡아맨 다음 머리형태를 형을 이루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목뒤의 교차점 부분에 새, 나비 등으로 조각한 뒤꽂이를 꽂았고 아래로 드리운 두 가닥 사이로는 곱게 장식한 댕기코를 내렸다.

바둑판머리는 어린 처녀애들의 머리형식의 하나였다. 바둑판머리라는 이름은 땋은머리형의 앞머리가 가림선을 중심으로 하여 바둑알을 놓은 바둑판과 같은 장식을 하였다는 데서 생겨났다. 처녀들이 단장했던 여러 가지 땋은머리 형태들은 우리나라 처녀들의 몸매와 차림새, 정서와 취미에 잘 어울리는 소박하면서도 예쁜 머리형식으로서 오랜 역사적 기간을 통하여 근대까지 전해 왔다. 우리 여성들 속에서는 머리를 항상 깨끗이 단장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활기풍으로 여겨 왔다. 여성들의 머리단장 하나에도 그들의 정결하고 아름다운 품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머리단장을 깨끗이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부터 정리하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병으로 누워 있다가도 손님이 오면 꼭 머리단장을 하고서야 대하였으며 5월 단오나 그밖의 명절날에 시냇가의 맑은 물에서 머리를 깨끗이 감아 단장하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겼다. 우리 여성들이 이렇듯 머리단장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6월 유두(流頭)와 같은 연중행사도 생기게 되어 이날에 향기 그윽한 창포로써 머리를 감고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생겨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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